여보 힘을 내줘
궂은 날씨 때문일까. 하루 종일 마음이 눅눅하게 젖어 있다. 창문 너머의 빗방울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흘러내리는 건지 눈물이 흘러내리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마음이란 것이 손에 잡히는 물건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잡아서 아무도 보지 못하게 꽁꽁 감추어버릴 텐데. 십자가처럼 무겁게 짊어진 얼굴빛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 마음이란 것이 손에 잡히는 것이라면, 밀가루 반죽하듯 주무르고 치대다가, 언젠가 제멋대로 내동댕이칠 수도 있을 텐데.
여보, 내 마음이 왜 이럴까. 당신은 병상에 누워 숨을 고르고 있는데, 나는 왜 이리도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불안에 떨고 있을까. 당신을 위해서라도 이러면 안 되는데,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휘청거리는 내 모습이 기도의 자리를 잃게 만든다. 아직 같은 하늘 아래에 있으면서도 나는 무엇이 두려워 이렇게 자신을 잃어가고 있을까. 오늘따라 당신에게 뻗쳐오는 먹구름이 더 짙게 보인다.
그런 당신을 바라보다가 문득 당신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문장은 되니까, 간절하게 써보라”던 당신의 목소리.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며 살았던 그 경험이 녹록하지 않았으니, 언젠가 꼭 글로 적어보라고 했던 당신의 그 말을 오늘 가슴에 새긴다. 맞아, 이런 날일수록 뭔가를 붙잡고 매달리는 것이 필요하다. 쓰는 일, 그 생각 하나가 나를 삶 쪽으로, 당신이 있던 자리 쪽으로 조금씩 끌어갈지도 모른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어줍잖은 허무주의자여서 자주 넘어진다. 회의하고, 포기하고, 주저앉고. 그럴 때마다 당신이 내게 힘을 주었지. 지금도 당신의 응원이 필요하다. 당신이 응원하는 소리를 듣고, 다시 기운을 낼게. 생각의 잔가지를 쳐내고 용기 있게 실행하면서 살아갈게. 시간이 없다고, 피곤하다고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쓸게.
그런데 지금의 나는 그저 흘러가는 시간만 축내고 있는 것 같아. 멍하니 앉아 있는 나를 스스로 들여다본다. 게으른 성격 때문일까,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는 나약한 의지 때문일까. 당신, 이런 날 보고 늘 그랬지.
“아직 멀었어.”
그래, 지금도 멀고멀었다. 하지만 이제는 해 볼 거야. 당신이 보고 있는 그 아득한 정신 속으로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어져 있다고 믿을 거야. 여보, 제발 힘을 내줘. 그 힘이 내게도 전해져 오기를. (당신이 떠나기 전 5월 어느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