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이 걸려서 일주일 넘게 산에 가지 못했다. 등산을 시작한 이래로 최장기 결석이다. 웬만하면 가려고 했으나 다리가 떨려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약을 먹어도 기침이 나왔다. 기침을 한 번 하면 가슴이 아프고 온 몸이 울렸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밥에다 국 한 가지 겨우 끓여서 말아 먹었다. 주어진 일, 늘 해오던 일을 여전한 방식으로 한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퍼펙트 데이즈' 라는 영화를 보았다. 도쿄에서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히라야마 씨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산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식물에 물을 주고 출근한다. 청소차를 몰고 공중 화장실로 가서 문짝이며 세면대, 변기까지 정성껏 청소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은 돋보기를 대고 꼼꼼하게 살피면서 구석구석 문지른다.
운전 중에는 카세트 테이프로 올드팝을 듣고, 점심은 공원에서 빵과 우유를 먹는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그 자리에서 필름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는다. 하루 일과를 마친 후에는 사우나에 가서 낮에 흘린 땀을 비누로 씻어내고 뜨거운 탕에 들어가 피로를 푼다. 마지막으로 단골 식당에 가서 술을 한잔 한다. 집으로 돌아와 이부자리를 펴고 책을 꺼내 읽는다. 그는 나무에 관한 오래된 책을 읽으며 잠이든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왜 퍼펙트 데이즈라고 할까? 늘 반복되는 삶이지만 거기에는 히라야마 씨가 선택하고 고수하는 특별한 것들이 숨어 있다. 그는 오래된 카세트 테이프로 음악을 듣는다. 스마트폰으로 듣는 음악과 테이프에서 재생되는 음악은 분명 다를 것이다. 사람들은 편리함과 손쉬운 것에 익숙해져서 테이프에서 재생되는 음악을 포기한지 오래되었지만 히라야마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지킨다.
그는 필름카메로로 찍은 사진을 현상하여 월별로 분류하여 상자에 보관한다. 스마트폰 사진은 편리하지만 현상한 사진처럼 만져보며 상자에 저장할 수 는 없다. 눈으로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손으로 만지고 실물을 저장할 때 사진은 더 특별해 질 것이다. 새삼 우리가 잊고 있었던 작고 특별한 기분이 주는 기쁨을 히라야마씨는 소중하게 여긴다.
사우나에서 낮에 쌓인 먼지를 비누로 씻어내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일은 낮 동안 열심히 일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일 것이다. 히라야마씨의 표정이 '아구 시원해, 바로 이맛이야' 라고 말하는 듯하다. 고단하게 했던 피로가 물러가고 고스란히 그의 몫으로 남은 행복이 탕에서 물과 함께 넘친다.
일상이 무탈하게 잘 굴러가는 것이 기적에 가깝다. 매일 아침 일어나 밥을 짓고 도시락을 싸고 출근을 해서 업무를 하고 등산을 한 뒤 책을 빌리고 퇴근을 하고 영화를 조금 보다가 잠드는 나의 일상은 겉으로 보면 평온한 것 같지만 실상을 전혀 그렇지 않다. 하루 종일 파도처럼 출렁일 때가 많다.
아침부터 짜증이 날 때도 있고 업무 중에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심지어 등산을 할때도 방금 전의 일로 마음을 쉬이 가라앉히지 못할 때가 있다. 더우기 연말에는 다시 하게 된 일 때문에 심란하고 뒤숭숭했다.
마음 같아선 퇴직을 하고 집에서 쉬고 싶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적 여건들이 나도 모르게 원망이 되었다. 구직도 귀찮기 짝이 없고 딱히 갈 데도 없는 것 같아 다시 눌러 앉긴 했지만 내가 잘한 짓일까? 이까짓 사무실이 뭐가 좋다고 이러고 눌러 앉았을까? 나는 어쩌다가 쉬지도 못하는 인간이 되었을까? 신파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새해에 대한 바람이나 기대보다는 해묵은 피곤한 일상이 기정 사실로 되는 것 같아서 우울했다. 우려와 걱정을 가라앉히느라 무진장 애를 써야 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늘 반복되는 일상에서 쓸데없이 복잡하고 불안하고 우울한 마음을 가지치기 한다면 10점 만점에 10점은 아니더라도 조금은 행복한 일상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나의 일상을 퍼펙트 데이즈로 만들 재료가 있을까? 히라야마씨에게 카셋트가 있다면 나에게는 아침 요리가 있다. 맛있게 만들자, 내일 아침에는 겨울 음식 중에서 나의 필살기인 청국장을 끓여야겠다. 돼지고기와 신김치, 대파와 콩나물을 넣어 보글보글 끓여서 한 뚝배기 하면 기분 전환이 될 것이다. 필름 카메라가 아니지만 나도 매일 사진을 찍는다. 남들이 뭐라 하든 내가 찍은 사진을 볼 때 즐겁다. 히라야마씨에게 공원의 나무가 친구라면 내게도 등산로에 친구가 있다. 구름 놀이터, 새가 노래하는 곳, 타라의 언덕이 내게 주는 힐링이 만만치 않다.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교회공동체는 내게 보약이 아니던가. 글쓰기도 놓지 말아야 겠다. 퍼펙트하지 않아도 내가 읽어서 재미있는 글을 쓰면 될 것이다.
그가 누리는 퍼펙트한 일상을 보고 있을 때는 내가 누리는 일상이 너무 초라해 보였는데 생각을 바꾸고 다시 보니 뜻밖에 나의 일상도 아직 꿈을 버리기엔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에는 일상의 기쁨이 많아져서 10점 중에 10점은 아니더라도 점수 상승 포인트에 기대어 좀 더 기쁘고 즐겁고 감사한 날 들이 되기를 바라본다.
독자님, 작가님, 새해에 일상의 축복 많이 받으시고 10점 만점에 10점 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