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쌀쌀했습니다. 그래도 겉옷을 입지 않고 사무실에서 가볍게 입던 옷 그대로 나섰습니다. 바람이 차가운데 이대로 가도 될까 했지만 걷다 보면 이내 춥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냥 갔습니다. 겨울에는 늘 그랬습니다. 추워서 패딩을 입으면 얼마 가지 않아 더워져서 벗은 패딩이 여간 거추장스럽지 않았습니다. 허리에 묶어도 보고 어깨에 걸쳐도 보고 접어서 한 쪽 팔로 들고 다니기도 해 보았지만 수고스럽기는 매 한 가지였습니다.
사무실을 나와 여전한 방식으로 뒷동산으로 난 오르막 길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공원을 채 지나기도 전에 추위가 달아났습니다. 겨울에 추위를 재빨리 떨쳐내고 싶으면 빨리 걸으면 됩니다. 그 길이 오르막이라면 추위가 달아나는 속도는 더 빨라집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저희는 많이 걸어 다녔습니다. 남편이 집을 나갈 때 차를 가지고 가버렸기 때문에 저와 두 아이는 추운 겨울에도 걸어 다닐 일이 많았습니다.
아이들이 춥다고 하면 저는 무조건 "빨리 걸어라 빨리 걸으면 안 춥다."고 다그치기 일쑤였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참 인정머리 없는 엄마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춥지? 이 손을 좀 봐, 얼굴은 또 어떻고, 몸이 꽁꽁 얼었구나~"하고 먼저 공감을 해 줄 것 같은데 그때는 그런 걸 잘 몰랐습니다. 생존 전쟁의 한 가운데서 전사처럼 살 때여서 저나 아이들의 감정을 살필 여유가 없었습니다. 말끝마다 옳은 X소리만 늘어 놓았습니다.
겨울 산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새들도 낮은 소리로 읊조리듯 지저귀고 바람도 햇빛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쿨쿨 잠들었습니다. 휴식과 안식, 쉼의 여유가 느껴집니다. 겨울산의 평화가 혼란한 세상 시국과 비교되어 더 귀하게 다가옵니다. 게다가 겨울 산의 여유와 안식이 저에게도 전해져 덩달아 쉼을 누립니다. 뇌도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고 컴퓨터 화면의 빛에 시달리던 눈도 잠시 쉽니다.
쉼의 진짜 주인공은 나무입니다. 나무는 치열했던 그간의 분주함을 내려놓고 하늘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늘이 늘 거기에 있었지만 나무는 그를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좋아합니다. 하늘또한 봄여름가을 나무의 수고를 위로라도 하듯 맨몸으로 서 있는 나무를 반갑게 맞아줍니다. 잎들을 다 떨구고 나면 허전해서 어쩌나하는 걱정은 기우였습니다.
나무와 하늘을 보며 새로운 세상, 새 하늘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려면 다 떨구어 버리는 시간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떨구어 버리고 털어 버리고 내려 놓는 것이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비결이지요. 하지만 내려 놓는 것이 인력으로 되지 않는 것을 종종 경험합니다. 환경이 떨굼으로 몰아가야 억지로 내려 놓을 수 있지요. 자발적인 내려놓음보다는 환경에 떠밀려 내려 놓음을 당하는 것이 사실에 가깝겠습니다.
새들이 노래하는 곳을 지나 타라의 언덕에서는 지난 폭설에 쓰러진 소나무가 공룡처럼 누워있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부러진 자리에 소나무의 속살이 햇빛을 받아 반짝입니다. 부러지고 베어졌을때 숨겨져 있던 속살이 비로소 드러난 것입니다. 광채가 나는 속살에 아직도 진한 솔향이 남아 있습니다. 속이 이미 썩어서 부러질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지만 속이 아무리 흠없이 깨끗하고 좋은 향기를 품고 있다 해도 부러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를 보면 인생에서도 한 사람의 몰락을 두고 나무의 경우처럼 '썩었을거야, 썩어서 부러질만해서 부러진 거야'하며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되겠구나 합니다.
며칠 사이에 부러진 나무를 공원 관리원들이 톱으로 베어 내기도 하고, 벤 나무를 한데 모아 두기도 했습니다. 나이테를 가만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참나무의 테는 비교적 일정합니다. 같은 속도로 조금씩 천천히 쫀쫀하게 컸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벗어남이나 들쭉날쭉함이 없어서 학생으로 치면 모범생입니다.
반면에 소나무의 나이테는 테의 간극이 일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환경에 따라 쑥쑥 커기도 하고 찬찬히 커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소나무는 환경에 좀 더 유연하게 대처했다고 여겨집니다. 환경의 영향을 잘 받다보니 이번 폭설의 환경에도 그만 부러졌겠다 합니다.
참나무든 소나무든 가지가 꺾여도 끝내 살아 남아서 여기저기 꿋꿋하게 서 있습니다. 겨울에 잠시 쉬었다가 봄이 오면 새싹을 튀울 것입니다.
저의 연말 최대 이슈는 주일학교를 내려 놓은 것입니다. 17년 동안을 한결같이 주일학교 고등부에서 선생님으로 혹은 리더로 학생들과 함께 웃고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공동체, 몸의 일부 같은 주일 학교 공동체를 환경에 떠밀려 부득불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했던 제자훈련, 뜨거웠던 여름과 겨울 수련회, 교사 리트릿, 심방과 상담 등 때마다 시마다 가장 가슴 설레며 은혜받은 사람은 저라고나 할까요?
주일이면 예배가 끝나는 대로 반 별로 모여 나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부러지고 베어짐을 당했을 때 세대를 초월해서 더욱 진솔한 마음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드러난 속살을 내어놓고 고난을 해석하며 함께 성장했지요. 서로의 속살을 나눌 때 우리의 부러짐과 베어짐은 성장을 위한 좋은 환경이 되어 주었습니다. 무성했던 잎이 떨구어져서 남아 있는 것이 없어졌을 때 우리에게 열린 새 하늘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막상 주일학교 공동체를 떠나려고 하니 상실감이 밀려 왔습니다. 저도 모르게 저의 일부가 된 공동체가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허전하고 서운한 마음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잎을 다 떨구고 나서야 온몸으로 하늘과 소통하는 나무를 보며 주일학교를 내려놓은 후에 제게 열릴 새로운 하늘을 소망으로 바라봅니다. 더 큰 구원으로 인도 되길 바라면서요.
아들과 언니와 새로 시작한 소품사업이 순항하고 있습니다.
소품사업의 순항도 기뻐지만 그보다 더 기쁜 것은 아들과 더 가깝게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들과 저는 둘 다 TMT입니다만 속사정은 좀 다릅니다. 저는 Too much talker이고 아들은 Too much thinker 입니다.
극단적인 E와 극단적인 I이기도 합니다. 저는 궁금한 것은 뭐든지 말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들은 깊이 생각하는 성향으로 웬만하면 미리 말하지 않지요. 저는 미리미리 생각해서 앞서가는데 아들은 현실에 집중합니다.
아들에게 미래에 해나갈 사업에 대해 저 혼자 구상한 것을 마구마구 털어 놓았습니다. 소품의 색상과 디자인 추가 문제, 계절에 맞는 소품 추가 등 생각나는 대로 아이디어랍시고 쏟아냈습니다. 투머치 카톡과 수다로요.
아들은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카톡도 핵심만, 이야기할 때도 핵심만을 외쳤고
저는 왜 그래야 되는지 설명을 하라고 했지요.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우리는 서로의 성향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말을 줄이고 아들은 말을 점점 많이 했습니다.
요즘 저는 핵심만 간단히 말하고 카톡도 3줄 이상 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아들은 점점 설명충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성향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며 상대방이 원하는 소통법을 장착하게 된 결과입니다. 우리의 소품사업이 순항하는 것보다 소통이 순항하는 것이 무엇보다 기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