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부터 간밤에 내린 눈으로 과연 등산을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식사 시간이 되어 나가보니 날씨는 많이 풀렸는데 응달에 얼음이 얼어서 많이 미끄러웠다.
길이 미끄러운거야 산에 올라 가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보다는 몸 상태가 산에 올라갈 만하지 않았다.
전체적인 컨디션이 전날보다는 조금 나은 듯하여 나섰으나 몸이 등산보다는 컨디션 회복에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 우선인 것 같아 곧장 발걸음을 돌렸다. 이틀을 연달아 등산을 하지 못했다.
감기가 시작된 것은 일요일 오후였던 것 같다. 전 날 토요일은 언니 집에 있었다. 언니와의 토요일 미션인 소품 제작을 위해서였다. 언니는 감기가 걸렸는데 잘 낫지 않아서 두 번이나 병원을 갔다 왔다고 했다. 너는 괜찮냐고 묻는 언니에게 "나는 원래 감기는 잘 안 걸려." 했다. 별 생각없이 한 말인데 막상 내뱉고 나니 말 실수를 한 것 처럼 마음이 찜찜하고 캥겼다.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너 정말 감기 안 걸리는 맞아?" 하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주일에 교회에서 리더 모임을 하는데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 때까지도 독감에 걸린 줄도 모르고 푹 자고 일어나면 나을 줄 알았다.
등산을 시작한 이래로 컨디션 때문에 가지 못한 날은 거의 없었다. 폭우와 폭설로 여름과 겨울에 하루 이틀 거르는 날은 있었지만 아파서 가지 못한 날은 기억나지 않는다.
등산이 좌절이 되니 그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하나 망설이다가 근처에 있는 빵집에 갔다.
달콤한 빵과 뜨거운 커피라도 마시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오징어 먹물 연유 바게트를 먹는데 평소에 먹던 맛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손을 떨면서 연유를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병원에서 지어온 약을 먹었는데도 낫기는 커녕 점점 더 아팠다. 수액을 맞으면 고생을 덜할 것 같아 병원에 갔다. 수액의 가격을 물어보니 기본이 9만원이고 영양제가 들어가면 12만원이라고 했다. 내심 놀랐다. 이렇게나 비싸다니, 예상한 가격의 2 배 였다. 미리 물어봤으니 망정이지 수액을 맞은 후에 물어봤으면 어쩔 뻔했나. 약을 잘 먹으면 시간이 지나면 낫겠지, 하고 사무실로 들어 왔는데 오후가 되니 기침이 쉬지 않고 나왔다. 수액을 맞지 않고 돌아온 것이 후회가 될 지경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라 회원들이 나가면서 크리스마스 인사를 건넸다. 그들처럼 크리스마스에 걸맞는 인사를 해야 하는데 그 사이 목이 잠겨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아무 말 않고 쳐다보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내색 않고 최대한 밝게 인사를 했다. 저녁이 되자 기침을 할 때마다 몸이 울리면서 온 몸의 살이 아팠다. 어서 집에 가서 눕고 싶었다.
크리스마스 기분내라고 하면서 어떤 분이 조각 케이크를 사오셨고 어떤 분은 김밥과 샌드위치가 같이 들어 있는 도시락을 사다 주셨다. 입맛이 없어서 그런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감기에 걸렸다고 입맛이 없기는 또 처음이었다. 아무리 아파도 여간해서 입맛이 떨어지지 않아 살이 빠질 일이 없었는데 웬일인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약을 먹으려면 뭐라도 먹어야 했다.
책상에 엎드려서 쉬다가 일어나 앉았다가를 반복하고 있는데 7시에 어떤 회원님이 팥죽을 들고 오셨다. 집에서 직접 끓였다고 했다. 팥죽과 함께 먹으라며 찬 통에 담아 온 오이지 무침도 꺼내 놓으셨다.
용기의 뚜껑을 열어보니 살짝 갈려진 쌀 건데기와 새알심이 들어 있었다. "오리지널 이잖아" 하는 말이 내 입에서 자동으로 나왔다.
아프고 입맛이 없을 때는 희한하게 옛날에 먹던 음식들이 떠 오른다. 000가 있으면 그건 좀 먹을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든다. 내게는 팥죽이 딱 그런 음식이었다. 팥죽과 동치미만 환상 궁합인줄 알았는데 오이지와 먹어도 잘 어울렸다. 오이지와 함께 먹으니 질리지 않고 개운하여 평소의 양만큼 거뜬하게 먹을 수 있었다. 기적이 일어나 내게 꼭 알맞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것처럼 신기하고 감사했다. 팥죽 덕분에 퇴근시간까지 거뜬하게 버틸수 있었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푹 쓰러지듯 누워 버렸다. 쉬고 싶고 자고 싶은 생각 밖에 없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치킨을 시켜 먹으며 크리스마스 영화를 보는 게 몇 년 동안 이어온 그날의 루틴이었는데 올해는 그정도의 소박한 즐거움도 누릴 수가 없었다. 대신에 밤새 기침이 나서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끙끙거렸다.
건강도 안전도 그 무엇하나 내 힘으로 지켜지는 게 없다. 아무리 조심해도 사고는 순간이고 아무리 건강 관리를 성실하게 해도 건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동안 건강하고 무탈하게 지내온 것이 하나님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자님들, 작가님들, 저처럼 독감 걸리지 마시고 건강하고 훈훈한 연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구원을 위해 낮고 낮은 곳으로 찾아 오신 예수님의 은혜가 풍성하기를 위해서도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