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낯설고 두려운 암이라는 현실 앞에서 흔들리던 그때, 나를 지탱해준 것은 곁에 있어준 사람들이었다.
서울에서 치료를 하는 동안 남편은 결혼 21년 만에 처음으로 요리를 하는 남자로 거듭났다. 평소 집밥만 먹던 우리 가족에게 배달 음식과 사 먹는 반찬은 잠깐의 대안일 뿐이었다. 그래서 남편은 유튜브 영상을 정독한 뒤 장을 보고, 재료를 세팅한 후 다시 영상을 들여다보며 요리하는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었다고 했다. 두부찌개, 제육볶음, 생선조림 같은 이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메뉴들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냈다.
날이 갈수록 자신감이 붙은 그는 나름의 순발력과 창의력을 발휘하며 척척 요리를 해냈고 딸들이 꽤 맛있다고 평했다. 첫째는 대학 첫 학기를 즐겁게 마쳤고, 둘째는 엄마의 부재 속에서도 씩씩하게 중학교 2학년 생활을 이어갔다. 덕분에 나는 마음 편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내가 집에 내려온 후 남편은 다시 회사만 다니는 남자로 복귀했다. 지극히 현재•오늘•지금에 충실한 사람임을 보여준 예다.^^)
그런 일상이 유지될 수 있었던 데에는 가족뿐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응원이 있었다. 암 진단 이후, 나 혼자만의 싸움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함께한 여정이었다는 걸 조금씩 깨달아갔다.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가족은 물론 가까운 지인들 역시 암과의 전쟁에 함께 참전해 준 든든한 조력자들이었다. 그들의 존재는 따스한 봄 햇살처럼 반갑고 따뜻하게 나를 감싸주었다.
곁에 함께 있어준 그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짧게나마 고마움을 전하고자 한다.
암 요양병원에 찾아와 준 젊은 날의 직장 동료 박찬오 소장.(매거진-내 인생의 절반을 함께한 그와 그녀에 소개) 나보다 몇 달 앞서 암 소식을 전한 그는 신장과 췌장에 암이 있어 항암치료 중이었다. 우리는 어쩌다 직장 동료에 이어 암 투병 동료까지 하는 거냐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송파에 있을 때도, 두 시간 넘는 거리였던 마포 병원까지도 찾아와 주던 그의 따뜻한 얼굴은 병원 로비에서 만날 때마다 눈물 나도록 고마웠고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얼마 전 박찬오 소장과 함께 나를 만나러 내려와 준 백 팀장님은 내가 입맛 없어하던 어느 날, 퇴근 후 소고기 사준다며 병원으로 달려와주셨다. 그날 처음 먹어본 한우어복쟁반은 정말 맛있었고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었다. 외로울 틈 없게 단톡방과 병문안으로 살펴준 두 사람과, 바쁜 와중에도 다녀가준 직장 동료 S선생님과 J사무국장님에게도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입맛이 없던 어느 날 갑자기 생각났던 비건 쑥 마들렌과 밤식이 쌀빵, 신선한 채소를 챙겨 송파와 마포 병원에 와준 든든한 대학 친구 B, 암 소식을 듣고 인천에서 우리 집까지 망설임 없이 달려와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친구 O와 그녀의 남편 K님은 기분 전환용 양말 여러 켤레와 상큼한 봄딸기를 요양병원까지 들고 와주었다.
병원 생활을 하며 봄을 느낄 틈도 없던 나에게 활짝 핀 봄꽃 사진을 찍어 보내주고, 거의 매일 안부와 에너지를 보내 준 지인들도 있었다. 산책 중에 봄꽃 사진들과 유쾌한 메시지로 웃게 해주고, 내 암과의 전쟁에서 총감독을 자청한 보건 교사 J동생, 환자복 위에 입으라며 경량 패딩 조끼 두 벌을 보내준 우아한 K언니, 병원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이모저모 조언을 아끼지 않던 꼼꼼한 Y언니까지. 그 따뜻함 덕분에 병실 창밖 풍경에도 봄이 찾아온 듯했다.
일요일 하루를 통째로 내주며 봄 햇살을 만끽하라고 이끌어준 한국산업은행 미인 S. 먼 거리에서 차를 몰고 와 여의도 맛집에서 버섯전골을 사주고, 목련이 막 피기 시작한 국회의사당 옆 공원에서 여유로운 봄날 오후를 함께 만끽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그날 하루는 24년의 봄을 몰아서 다 먹은 것 같은 날이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좋은 곳으로 나들이를 함께 해주고 옻칠 공방 수업에서 나를 위해 직접 만든 주방 도구를 선물해 준 소울메이트 Y언니, 치료 결과를 축하하며 아파트 현관 앞에 한살림 먹거리와 꽃다발을 조용히 놓고 간 브레인 K언니, 장대비 쏟아지던 퇴근길에 암 환자에게 좋다는 차와 꽃다발을 들고 찾아온 책과 함께 사는 K언니. 몇 년 만에 만나도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반가운 친구 C. 테니스를 좋아하는 것까지 변함없어 더 반가웠다.
톱스타로 혼자 지내는 내 근황이 늘 궁금하다며 퇴근길마다 안부 전화를 해주는 섬세한 L언니, 집밥 한 상을 정성스럽게 챙겨주고 성경책을 선물한 기도하는 J동생, 병원 일정까지 기억하고 그때마다 연락을 주던 친구 J와 C,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늘 지지해 주는 큰아이 때 태교 모임 친구 W와 K 그리고 L언니, 병원에 오가면서 남편과 차 한 잔 마시라고 커피 쿠폰을 보내준 씩씩한 P동생. 종종 안부를 묻는 J와 B선생님.
맛집에서 주문한 메밀전을 장맛비 쏟아지던 저녁, 집 앞으로 찾아온 사랑 많고 눈물도 많은 유치원 교사 J동생. 잘 해낼 수 있다며 응원과 함께 사과를 보내주고 지금도 여전히 나를 ‘사키’라 부르는 사진작가 친구 L,
선물로 받았다는 귀한 산삼 한 뿌리를 들고 휴가를 내서 찾아온 친구 S, 봄 햇살 가득한 날 직접 만든 꽃다발을 전해주며 빨리 회복하라고 눈물 흘려준 브레인 K 선생님. 바쁜 중에도 안부 전화와 글에 대한 솔직하고 진심어린 피드백을 전해주는 L동생.
남편과 두 딸이 좋아하는 만두를 택배로 보내준 기도하는 L언니, 오빠네가 농사지은 고구마와 감자, 양파를 택배로 보내준 직장암 방사선 치료 동기 Y, 미용실이 쉬는 화요일마다 안부 전화를 걸어와 밝은 목소리로 힘을 준 어릴 적 친구 J. 요즘은 어떠냐며 밥 먹자고, 차 마시자고, 보고 싶다고 먼저 연락해 주는 유쾌하고 솔직한 K언니. 최근 들어 한 달에 한 번은 꼭 그녀를 만나 건강 밥상 식당을 찾아 점심을 함께 먹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나를 생각하며 마음을 전해주었다. 사람은 결국 사람으로부터 위로받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걸 이 시간을 지나며 깊이 느꼈다. 잘 지내냐는 짧은 인사나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한마디, 소소한 선물과 작은 행동들 그 모든 것에는 따뜻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내 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있어 마지막 결정타가 되어준 행운의 한 스푼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보내준 그 따뜻한 응원과 기도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다. 평생 고마운 마음으로 떠올릴 사람들이다. 내 삶에 스며든 그들의 마음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지친 마음 곁에 조용히 앉아줄 수 있는 사람, 말하지 않아도 함께 있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 받은 다정함과 온기를 다시 되돌려주는 사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