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X International Airport 보안구역
“밀스타키! 밀스타키임?”
등 뒤에서 기습적으로 등장했던 아까 그 안전요원은 심사관을 가리키며 나에게 말했다.
“Hey, you! Mr. Kim!”
영어 들리는게 아직 익숙하지 않다. 밀스타킴이라니.. 나는 부스로 달려가 자리에 앉으며 인사했다.
“Good morning~”
[10:57 am]
컴퓨터 모니터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던 심사관이 입을 열었다.
“Mr. Kim! Did you live in Boston?”
(미스터김! 보스턴에 살았었죠?)
구름이 입국심사서류를 들고 차례를 기다리던 구름아빠가 구름이 보호자로써가 아닌, 나 자신이 된 순간이었다.
“Yes... I did...”
(네... )
심사관이 던진 그 한 문장의 질문으로 잊고 지냈던 지난 날의 비밀상자가 봉인해제되며, 흐릿했던 기억에 돋보기라도 댄 것마냥, 아주 선명하게, 아주 또렷하게,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불려 온 이곳은, 미국에 입국해도 되는지 적합성 여부를 따지는 곳이었던 것이었던 곳이어따.....
입국 심사대에서 말을 이상하게 하거나 수상한 점이 느껴지면 안전요원을 불러 따로 보내는 곳. 이곳에서 몇 마디 잘못 발사했다간, 그대로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야 한다.
무서움이 엄습했다..
{Boston}
나는 나탈리를 만나기 전, 보스톤에 산 적이 있다.
친구집 파티에 초대를 받은 어느 날,, 새벽 1시가 넘어 친구집을 나왔다.
친구집에서 우리집까지의 거리는 차로 20분. 그날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유난히 멀게 느껴졌고, 쏟아지는 졸음을 참기 위해 창문을 열었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졸음운전으로 비틀대던 내 차를 경찰이 세웠고, 핸드폰을 본거냐, 졸음운전이냐, 왜 천천히 가냐.. 면허증을 달라, 자동차등록증을 줘라,,
시키는대로 하던 중 코를 킁킁대기 시작한 경찰관.
“Have you been drinking?”
(너! 술 마셨어?)
“I had three glasses of wine.”
(네.. 와인 세 잔이요...)
경찰서로 데려가 음주측정을 했고, 여차저차 벌금과 두 달간 주(week) 1회 알콜 교육을 받으라는 처분을 받았다. 미국은 그것이 크건 작건 초범이건 상습범이건 법은 엄격했다.
주 1회 교육을 한달간 마쳤을 때, 급하게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 생겼고, 남은 4회차 교육에 대해 이렇다 할 조치나 담당자와의 커뮤니케이션 없이, 나는 보스턴을 떠났다.
- LAX International Airport 보안구역
당시 교육담당자가 기록으로 남긴 것이 이곳 LA공항 전산에 뜬 것이다.
어쨋든 여기서 몇 마디 잘못 뱉었다간 나는 미국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건, 그 당시 벌금은 납부했다는 것.
[11:03 am]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이 고립된 시간,,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육수만이 내 등을 어루만져 주었고, 무거운 마음으로 내려간 다크써클은 무릎을 쓰다듬어 주었다.
호텔 바우처와 캠핑카 예약서류 등 픽스된 여행일정을 하나하나 확인시켜주자, 함께 온 아내와 반려견은 어디있냐며, 펜과 종이를 주고는 아내의 인적사항을 적으라고 했다.
“I have her passport...”
(저한테 와이프 여권이 있어요...)
달라고 손짓하는 심사관.
나는 가방에서 나탈리 여권을 꺼내려다 옆에 나란히 있는 구름이 여권까지 심사관에게 같이 건넸다.
“HaHaHAHAhahahaHAHAHAHAHA”
(앗! 깜짝이야!!!)
구름이 여권을 본 심사관이 터진 것이다.
(이게 먹힐 줄이야...)
세상 일은 정말 알 수가 없다. 심사관은 본인의 강아지 사진까지 나에게 보여주며 댕댕이 이야기에 흠뻑 빠졌다.
나는 견종이 머냐? 이름이 머냐? 남자아이냐? 여자아이냐? 몇살이냐? 를 물으며 이 주옥같은 찬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작은 틈조차 내어주지 않았다.
한참을 대답하던 심사관의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저 분이 질문하시고, 내가 대답하는거 아님??)
내 여권 한 면이 깔끔하게 펼쳐지며, 시원하게 도장이 찍혔다.
“Have a nice trip!!”
“Thank you, sir”
[03:30 pm]
갑자기 떠오른 아찔했던 생각에 급 더워진 나는 창문을 열었다.
“그때 입국거부 당했으면.... 어후....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끔찍해.. ”
“오빠! 나 진짜 구름이 서류 힘들게 준비한거 알지?”
“나탈리가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지... 큼큼..”
“구름아! 니 서류는 하나도 안봤대!”
그저 멀뚱히 쳐다보는 구름이.
“나탈리! 우리 저기 들어가보자!!”
방문객센터(Visitor Center) 표지판이 날 살렸다.
주차장에서 길을 헤매던 우리는 우연히 캐년 절벽 라인을 따라 걷기 시작했고, 계획에도 없던 매더포인트(Mather Point View)를 마주하게 됐다.
수억 년의 시간이 꾹꾹 눌러 만든 거대한 협곡. 단단한 바위 틈새를 뚫고 서있는 소나무와 작은 풀의 생명력. 그리고 붉은 모래층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들,,
내가 산 시간,
그리고 살고있는 시간,
앞으로 살아야 할 시간,
그 시간의 둘레에서 붙잡고 있던 일들, 걱정한 것들,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분노하고 집착했던 순간들이 얼마나 작은 조각이었는지 깨닫게 해주었다.
광활한 자연이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서두르지 말라고,
천천히 흐르라고..
그 모든 곳이 너의 자리라고..
“오빠! 여기 오길 진짜 잘했다..”
“같이 와죠서 고마워!”
구름이도 먼곳을 바라보고 있다.
“넌 모하냨ㅋㅋㅋㅋ ”
“쟤 왤케 기분이 조은거야?”
“몰랔ㅋㅋㅋㅋㅋ 기여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우스림에는 볼만한 뷰포인트가 많다. 내가 2박을 잡은 이유다!!
캠핑장 체크인 전, 마트(General Store)에 들르자는 나탈리.
“금방 나올꺼니까, 구름이랑 차에 있어 오빠!”
“짐꾼 안필요해?”
“응! 갠차나!! 구름아 아빠 말 잘 듣고 이써!”
(오~~~ 왠열?!)
옴마가 내리고, 문을 닫자마자 난리가 난 구름이..
갑 중에 갑, 호들갑이다..
(개호들갑.. )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하라고... 쫌!!”
곧 무언가가 가득 담긴 종이봉투를 안고 나오는 나탈리. 안에 뭐가 들었는진 알 수 없었다.
[05:00 pm]
저녁준비를 위해 전기와 청수를 먼저 연결해달라는 나탈리.
(예예..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
나탈리는 저녁준비를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구름아! 엄마 바쁘니까 거기서 알짱대지말고, 밖에서 밥먹자!”
구름이 저녁을 준비하는데, 야외테이블에 앉은 그녀는 내가 잘하고 있는지 꼭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밥을 쫌 더 넣어라 내시야!!”
(예예..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
나탈리 몰래 한 숟갈을 더 퍼주었다.
“쉿!! 엄마한텐 비밀이다!!”
구름이는 순식간에 밥통을 비우고는 씨익 웃는다.
“하이파이브!!”
손을 척! 하고 올리는 구름이.
“다 먹었음 들어가자!”
차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눈을 의심했다. 상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렸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각종 쌈채소와 쌈장 그리고 고추와 마늘, 고기를 찍어먹을 소금까지 완벽하게 준비되있었고, 라스베가스에서 포장해 온 오삼불고기가 테이블 끄트머리에서 한 발을 걸치고 있었다. 테이블엔 더이상 무언가가 올라갈 자리가 없었다.
쌈채소, 고추, 마늘, 쌈장 등은 아까 나탈리가 마트에서 사온 것이다.
(그걸 여기서 판다는 것도 신기함ㅋㅋㅋㅋㅋㅋ)
“짜잔~ 오늘을 위해 준비한 대패삼겹!!”
“대박사껀! 나탈리!”
그랜드 캐년에서 먹는 대패삼겹이라.. 후우..
“오빠를 위해 준비했지!”
“고마워.. 와이프... ”
“고생했다! 남편!”
“고생은 무슨.... ”
갬동의 순간이다.
“고생했어! 공항에서 안쫒겨나고!”
(아......... 그거... ??)
“구름이 넌 아빠 덕분에 무사통과 한거야!!”
칭찬인건지 맥이는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득 차린 테이블과 나탈리를 번갈아보며, 코 끝이 찡해졌다.
(그래.. 히터를 안틀면 어떠냐.. 내가 옷 다섯 벌을 더 껴입고 자도 되지.....)
나탈리와 구름이가 자리에 착석 후, 냉동실에서 대패를 꺼내자, 백색비계와 새빨간 고기에 내려앉은 하얀 서리가 김을 내뿜었다.
이제 내 차례다!!
후라이팬에 종이호일을 깔고, 가로 4cm, 세로 3cm 크기의 대패 두 점을 뜨겁게 달궈진 후라이팬에 눕혔다.
(종이호일을 깔면 기름이 튀지 않는다)
초ㅑ아아아아아아아아앙아ㅇㅏ~~~~~
비주얼과 소리가 오감을 자극했다. 침이 넘어간다. 나는 곧바로 냉동실을 열고 쏘주를 꺼내며, 고기를 한번 뒤집었다.
초ㅑ르르르르르르르르르아아아앙아ㅇㅏ~~~~~
쏘주병을 허공에 흔들자 슬러시로 변해버리는 쏘주.
“한 잔 받으시오. 부인!”
뚈뚈뚈뚈뚈뚈뚈뚈뚈~~~
소고기를 굽 듯, 정성스럽게 두 점만을 구어 나탈리 접시에 하나, 내 접시에 하나를 올렸다.
“고마와 나탈리!”
“고마와 오빠, 고마와 구름이!”
“짠~~~!!”
캬하~~~ 기가 막힌다. 정말!!
이건 머.. 어떻게 설명이 안된다.
이게 말이 됨? 이렇게 맛있어도 됨? 반칙 아님??
초ㅑ아아아ㅇㅏㅇㅏㅏㅏ~~ 뚈뚈뚈뚈뚈~~
짠~~!!
크흐으ㅇㅡ~~ 캬하ㅇㅏ~~~~
눈물이 난다. 눈물이 나.
고기를 한 점씩 굽는 것은 수고스러운 일이었지만, 고기를 다 먹을 때까지 두 점씩만을 올려 구워 먹었고, 나탈리가 사온 쌈채소와 라스베가스에서 공수해온 오삼불고기가 대패의 느끼함을 잡아주며 맛의 풍미를 더해 주었다.
나이가 들면 추억으로 먹고 산다는데,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더 생겼다. 당신이, 구름이가, 참 소중하다. 이 시간이 참 소중하다.
“아~ 진짜 너무 맛있다..”
“어딜 가도 이런 맛은 안나겠지?”
“안나지! 안나! 이 맛이 어디에서 나겠엌ㅋㅋㅋㅋ”
“아~ 이건 진짜 못잊겠다. 오빠!!”
“여기가 미슐랭 쓰리스타다!!!!”
그때, 158불 주유비가 잘 긁혔다는 카드사 문자가 나탈리 핸드폰에 도착했다.
‘네가 의심하는 모든 것들이 곧 사라질 것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데, 포춘쿠키 말이 딱딱 잘 들어맞는거 같네..”
“그러고보면 늘 걱정을 달고 산단 말이지..”
“벌어지지도 않을 일을 걱정하면서..”
“그러니까... ”
“우리 내일은 걱정하지 말고, 맘껏 마시자!!”
“그래! 내일은 여기 있어도 되니까 일찍 일어나지 말고 늦게까지 푹 자자!”
“조아써!!!”
“건배~~~~~~~~~~~ ”
초ㅑ아아아아아아아아앙아ㅇㅏ~~~~~
뚈뚈뚈뚈뚈뚈뚈뚈뚈~~~
초ㅑ아아아ㅇㅏㅇㅏㅏㅏ~~ 뚈뚈뚈뚈뚈~~
(의학적으로 설명이 되진 않지만, 난 여기서 감기가 다 나아따)
1차를 정리하는 동안, 나탈리는 구름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차로 돌아온 나탈리와 구름이.
“오빠!! 얘 응가를 왤케 마니 했지? 간식줬어?”
나는 구름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고개를 돌리는 구름이..
“아니.. 밥만 줬는데...”
(비밀지켜라.... 너........ )
[08:40 pm]
어느새 하나 둘 비운 맥주병들..
구름이 머리를 쓰다쓰담하는 나탈리. 을마나 쌔게 쓰다듬으면 구름이 눈꺼풀이 뒤로 넘어가려고 한다.
나탈리의 목소리와 행동이 커졌다는 건 취했다는 뜻이다.
“구름아! 아빠한테 와!!”
바로 날라오는 구름이..
(부르니까 바로 오는, 이런 놀라운 일이.. )
지도 거기 앉아 있다간 눈꺼풀이 뒷통수에 붙을까 겁이 났나보다..
한숨을 크게 쉬더니 뜬금없는 말을 꺼내는 나탈리.
“오빠!! 자유로워지는 게 그러케 힘든건가??”
“읭? 갑자기??”
“아니.. 뭐든 자유롭지가 않자나.. ”
“뭐가 자유롭지 않아?”
“시간에 쫓기고,, 돈에도 쫓기고,,, 그냥.. 먼가 늘 쫓기듯이 사는거 같아..”
(취중진담이다.. )
“언제부터 그랬던거 같아?”
눈을 게슴츠레 뜨고, 생각에 잠겼던 나탈리가 입을 열었다.
“나 어렸을 때, 엄마 아빠가 엄청 무서웠어.”
나는 별말 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니.. 뭐든 내가 잘 못하면 큰일날까봐.. 불안하고 그랬거든.. 못하면 안되니까... 그게 무서워서 뭐든 잘 하려고, 막 쫓기듯 산거가타.. ”
닭똥같은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지는 나탈리.
(이런 얘길 어디가서 하겠나. 남편이니까 하는거지..)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나탈리의 얘기를 들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서 그리고 사회에서까지,, 어쩔 수 없이 평가 받는 삶을 살아왔을테고, 그 안에서 인정을 갈구했을 나탈리.
어렸을 때, 엄마 아빠한테 인정받고 싶었겠지..
“나 진짜 많이 혼났어.. ”
“그거 남자 만나고 다닌다고 혼난거라며..ㅋㅋㅋㅋ”
아예 없던 일은 아니었는지, 갑자기 피식 웃는다.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탈리!!”
“응??”
“자유롭고 싶으면 ‘오늘이 선물이다!‘ 라고 생각하고 살면 돼! 그러면 다 돼!!”
“어?! 나 그거 알아! present 현재!! 선물!!!”
“잘아네!! 아~~~~~~~ 근데 이제 졸리다!!”
“내일 캐년 구경해야지..”
“아.. 그래..?? 그랬어? 그럴까...??”
도망칠 곳도 없다...
x 됐다....
(구름이는 엄마가 회식을 하고 들어오는 날이면 엄마 근처에 가지 않는다.. )
(나도 집에 내 켄넬이 있엇으면 조케따... )
- 그랜드 캐년 캠프의 작은 정보
* 그랜드 캐년 캠핑사이트에서는 인터넷이 잘 안터진다는 소문에 걱정을 했건만, 역시나 걱정 따윈 진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풀어버린 내 콧물과 같은 것!!
* 그랜드 캐년 캠핑장은 인기가 많은 곳이라 수개월전에 예약을 해야된다.
- 술 기운에 센치해진 새벽 2시
돈이 없던 시절, 돈이 들지 않는 산을 오르곤 했다. 산을 오르는 일도 나에겐 나름의 여행이었다.
깜깜한 새벽, 랜턴도 없이 산을 오른 적이 있다.
칠흑같이 어두운 산 속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새소리와 물소리, 내가 밟는 낙엽소리 뿐이었고, 눈으로 보이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한 발 한 발 땅에 집중하느라 무섭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산 중턱 쯤 올랐을 때 날이 밝았고, 바위에 걸터앉아 올라온 길을 돌아봤다. 어두워 보이지 않던 길이 모습을 드러내자, 험난한 길을 넘어지지 않고, 얼마나 잘 걸어왔는지가 보였다.
깜깜하고 막막했던 내 삶도 한 발 한 발 넘어지지 않고, 잘 걸어왔구나 싶었다.
(미국 땅을 밟은 게 어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