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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 한스푼 Jul 16. 2024

두 아이를 임신하고 낳으며 배운 것들

입덧, 임신소양증, 가족의 암 투병을 겪으며

 입덧도 유전이라 했던가? 엄마는 나를 임신했을 때 입덧으로 무척이나 고생했다고 들었다. 설마 했는데, 나의 입덧도 만만치 않았다. 밥상 앞에서 후각은 100배 예민해졌다. 남편은 냉장고 문을 열기 전, ‘긴급 대피령’을 내렸다. 나는 신속하게 안방으로 피신한다. 남편은 반찬 뚜껑을 열고 환기를 한번 시킨 다음, 냄새 퇴치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며 나를 불렀다. 뭔가 냄새 때문에 비위가 살짝이라도 건드려지는 순간, 나는 360도 롤러코스터를 탄다. 울렁거리고 메스꺼워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간다. 변기와 씨름 한판의 사투를 격렬하게도 벌인다. 천하장사 배지라도 걸려있는 것처럼. 먹는 것만큼 토해내다 보니 진이 빠지고 힘들었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강제 다이어트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남편, 갑자기 딸기가 먹고 싶네.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고. 절대 내가 아니고 아기가!”

 임산부가 되면 배속 아기를 핑계 삼아 마음껏 먹는 행복한 상상을 했었다. 보기 좋게 산산이 부서졌다. 먹는 것이 더이상 행복하지 않았다. 아이를 위해서 뭐든지 잘 먹어야 했지만, 뒷감당이 두려웠다. 어떻게 이런 울렁거림을 견딜 수 있을지 입덧이 심한 임산부의 고충을 뼈저리게 느꼈다.      


 갑자기 모기 물린 것처럼, 크고 빨간 두드러기까지 온몸에 일어났다. 산부인과에 달려가 링거를 맞고 대학병원에 가서 보습제와 약을 처방받았다. 임신으로 극심한 호르몬 변화와 면역력 저하로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일명 ‘임신소양증’이 의심되었다. 

 “산모님, 기형에 대한 위험성이 낮은 약으로 처방해서 효과는 바로 안 나타날 수 있어요. 약을 거부하면 태아에게도 스트레스가 그대로 전달돼요. 약 먹으면서 가려울 때는 미지근한 물로 샤워하고 보습제 꼼꼼히 발라주세요.”     

 한번 간지러우면 모든 신경이 피부로 집중됐다. 거기에 긁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도 추가됐다. 잘 때도 간지러워 긁다가 몇 번씩이나 깼다. 그렇지만 울면서 약 먹기를 멈췄다. 나의 간지럼 완화를 위해 약을 먹는다는 사실이 나를 더 불안하고 무섭게 만들었다. 

 ‘위험성이 낮은 거지,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 진짜 괜찮을까? 혹시, 이 약을 먹고 아이가 잘못되면 어쩌지?’

 아기를 잠시 꺼내 놓고 치료를 마친 다음에, 배 속에 다시 집어넣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21세기에 그런 신기술이 개발되지 않았음에 원망스러웠다.     

 몸과 얼굴은 두드러기 천지였다. 외출은 더욱 꺼려졌고 진료가 있는 한여름에도 긴 팔, 긴바지, 모자까지 꽁꽁 싸매고 다녔다. 그 결과 비타민D 수치까지 낮아져 먹는 약을 처방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밖에 나가서 햇빛을 쏘이며 산책 좀 하라고 권유했다. 나는 역시 ‘말 잘 듣는 모범생’이다. 씩씩대면서도 걸으라고 하니 무작정 걸었다. 뜨거운 햇빛에 땀이 나면서 속상한 마음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건강한 다리가 있어서 이렇게 걷고,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 시멘트 틈 사이로 강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꽃도 보았다. 어떻게 이 여리여리한 풀이 시멘트 바닥에서도 꽃을 피웠을까? 참 기특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힘든 시간도 지나갈 거라고, 너의 아이도 이렇게 잘 견뎌내고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살며시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가려운 피부에만 집중하느라 내가 가진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겼구나 싶었다. 어쩌면 두드러기 가운데 아기와 나는 잘 견뎌내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두드러기는 그렇게 3~4개월 동안 지독히도 나를 괴롭혔다. 출산 후 호르몬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면 낫는 경우가 많은데, 다행히 조금씩 사라졌다. 마치 기적과도 같았다. 가려움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니 잠도 제대로 잘 수 있었다. 아기에게 미안한 마음도 덜어내며 배 속에서 태동하는 아기를 온전히 느꼈다. 이제야 내가 소중한 생명을 품고 있구나! 실감하며 몹시 감사했다. 어찌나 아기가 배 속에서 발로 차던지. 남편은 아기 축구화부터 장만해야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기쁨도 잠시, 시어머니는 다발성 골수종이라는 혈액암 판정을 받았다. 아주버님, 형님 그리고 시어른들과 의논하며 치료를 어떻게, 어디에서 받을지, 간병인을 어떻게 쓸지 결정해 나갔다. 시어머니가 형제가 있고 남편이 외동이 아닌 것에 감사했다. 아픔을 나눌 가족이 있다는 것은 흔들리고 요동치는 마음을 붙잡게 했다. 특히나 항암으로 입맛이 없는 시어머니를 위해 막내 이모님은 매일같이 반찬을 해오셨다. 간병인이 쉬는 주말을 대신해서 병간호도 서주셨다. 막달 직전까지 남편과 병원에 찾아다녔는데 항상 고생하고 애쓰고 있다며 격려도 많이 해주셨다.      

 시어머니는 힘든 치료를 받으면서도 이겨내려고 많이 애쓰셨다. 링거 줄을 달고 복도를 돌며 열심히 운동하셨다. 그렇지만 변비가 생기는 부작용으로 많이 고생하셨다. 쾌변이라도 한 날은 소녀처럼 기뻐했지만, 치료가 힘들거나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는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종일 마음이 쓰였지만 위로의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해 드린 것 같다. 한 번씩 시어머니가 차려 주신 정갈하고 맛있는 음식들이 생각날 때면, 그리움과 죄송함이 겹친다.


 막달에 자궁경부(자궁 아랫부분으로 아이를 받쳐주는 근육) 길이가 짧아져 조산기 조짐이 보였다. 남편이 있을 때만 꼼짝없이 누워있으며 “물~ 과일~ 떡볶이~” 상전 노릇을 했다. 남편이 없을 때는 누워있는 것도 허리가 아프고 지루해서 요리조리 움직였던 것은 ‘쉿! 비밀’이다. 다행히 39주를 채우며 하늘의 별들이 쏟아지는 경험을 하며 아기를 낳았다.     


 엄마가 산후조리를 도와주셔서 집밥을 맘껏 먹었다. 미역국도 바지락 미역국, 돼지족 미역국, 소고기 미역국 등 질리지 않게 맛있게도 요리해주셨다. 상황에 따라 어떻게 할지 배우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앉아서 젖을 줄 때마다 회음부가 너무 아팠다. 실밥을 뽑으러 갔는데 실밥이 중간에 풀렸다며 다시 회음부를 꿰맸다. 임신 출산 카페에서 회음부를 재봉합하는 경우가 있다고 보기는 했다. ‘아이고 운도 지지리도 없네. 설마 나에게 일어나겠어? 그럴 확률은 대체 얼마나 될까?’ 지나쳤다. 운명의 장난 같았다. 운도 지지리 없는 주인공은 내가 되었고, 재봉합 할 확률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이렇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둘째 임신 때는 3살인 첫째를 데리고 산부인과에 다녔다. 1~2시간을 같이 기다려야 할 때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아이를 가만히 앉혀놓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임신성 당뇨 재검사 때는 1시간 간격으로 4번의 채혈을 하고 결과를 기다릴 때 ‘시가나 친정이 가까워 잠시라도 맡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무엇보다 입덧 속에서 첫 아이를 위한 음식을 만들 때는 엄마는 참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둘째 출산 때에는 첫째를 낳아봤기 때문에 조금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간호사도 요령이 있을 줄 알고 “아시죠? 힘주시면 돼요.”하고 분만실로 나를 데려갔다. 알겠다고 했지만 ‘한 번의 출산 경험은 언제 적 일이고? 나는 여기 왜 있으며? 어느 지점에 힘줘야 할지?’ 머릿속은 이미 새하얗게 변했다. 또 출산 직전에 심한 치질로 고생했다. 힘 줄 때마다 내 똥꼬에서 출산을 대신하는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결국 의사 선생님은 내 힘으로는 아기를 낳기에는 역부족하다는 빠른 판단을 내렸다. 간호사에게 내 배를 압박하도록 지시했고 나는 울고불고 소리를 지르며 출산을 끝낼 수 있었다.     

 출산 후 회음부가 잘 아물고 괜찮은지 보러 갔다. 다행히 회음부는 잘 아물었지만, 자궁에 피가 고이고 지혈이 되지 않아 처치를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다음 출산은 산모에게 너무 위험할 수 있어요. 그만 아이 낳으세요.”라며 강제로 임신 종료를 통보했다.      


 임신과 출산 과정이 책 한 권이 술술 써질 만큼 현란했다. 이 두 명의 아이들이 더 소중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마음을 졸이며 병원에 갔다가 건강하게 뛰는 심장 소리에 위안이 되었다. 아기가 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발로 뻥뻥 찰 때는, 내 배가 뒤흔들려도 너무나 좋고 신기했다. 탯줄을 통해 나의 감정과 생각을 공유하며 아이와 하나가 된 것 같았다. 때론 신랑이 시어머니 병간호로 집을 비울 때, 배 속 아기를 붙잡고 의지했던 기억도 난다. 내 안에 ‘내 편’을 붙들고 외롭고 힘든 시간을 견뎠다.      

 시이모님들과 시외삼촌들, 사촌들도 계속해서 시어머니 병문안을 왔고 힘이 되어 주었다. 암 투병을 함께 나눌 가족이 있었기에 그 시간을 버텼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가족이 주는 힘과 위로를 배웠다. 넘어질 때 일으켜 세우고 위기 속에 더 단단해지라고 신은 우리에게 이렇게 많은 가족을 주었나 보다. 

 “지독히도 불안하고 흔들렸던 감정들이 따뜻함으로 채워졌습니다. 그 시간 함께 견뎌주시고 보듬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입덧롤러코스터

#음식냄새대피령

#임신소양증두드러기고난

#다발성골수종혈액암

#함께하기에견딤

#많은가족을준이유

#하늘의별을보며출산은이제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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