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야의 돋보기] 제9화
제5원소

by 순야 착지


사대(四大)의 충돌을 녹여내는 ‘원융(圓融)’과 자비의 빛


월요일 아침, 뉴스를 켜면 온통 전쟁과 갈등, 혐오의 소식뿐이다. 세상도, 우리 마음도 서로 다른 생각과 이익이 끊임없이 부딪히며 파괴를 향해 치닫는 듯하다. 모든 것이 뿔뿔이 흩어지는 이 분열의 시대에, 우리를 다시 하나로 묶어줄 힘은 어디에 있을까.

뤼크 베송 감독의 영화 《제5원소》는 거대한 악(파괴 본능)이 지구를 삼키려 할 때, 우주를 구할 유일한 무기가 흙(지), 물(수), 불(화), 공기(풍)의 네 가지 돌, 그리고 신비로운 '제5원소'의 결합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화려한 SF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서양 철학의 연금술이 불교 교학의 정점인 원융(圓融)의 경이로운 순간과 만나는 것을 목격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절망을 깨우는 제5원소

우주의 절대 악인 거대한 불덩이가 지구를 향해 맹렬히 돌진해 오는 절체절명의 순간. 이집트의 낡은 신전 한가운데에 네 개의 돌이 제단 위에 놓여 있다. 주인공 코벤(브루스 윌리스) 일행은 우여곡절 끝에 이 돌들을 작동시키는 방법을 깨닫는다. 돌 위에 모래(흙)를 붓고, 땀방울(물)을 짜내고, 성냥(불)을 긋고, 깊은 숨(바람)을 불어넣자 굳게 닫혀 있던 돌들이 열리며 빛을 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네 가지 원소를 하나로 묶어낼 중심, 즉 ‘제5원소’인 릴루(밀라 요보비치)가 작동해야만 한다. 그러나 릴루는 인류가 저질러 온 끔찍한 전쟁과 학살의 역사를 학습한 뒤, 짐승처럼 웅크린 채 깊은 절망에 빠져 있다. “무엇을 위해 세상을 구해야 하죠? 당신들은 늘 부수기만 하잖아요.”

그녀의 말처럼 파괴로 점철된 인간들을 굳이 살려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코벤이 다가가 그녀를 껴안으며 절규한다. “그래도 세상에는 사랑할 만한 것들이 있어. 내가 널 사랑하듯이.” 그가 릴루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순간, 죽어가던 제5원소가 경이롭게 깨어난다. 네 개의 돌에서 뻗어 나온 에너지가 릴루를 관통하며 하나로 융합되고, 릴루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신성하고 거대한 빛의 기둥이 우주로 쏘아져 절대 악을 차가운 사해(死海)의 돌덩이로 굳혀버린다.


철학의 돋보기: 엠페도클레스와 ‘사랑’의 연금술

영화 속 네 개의 돌은 스스로 작동하지 않는다. 증오와 파괴가 지배하는 우주에서, 이 물리적 원소들을 하나로 결합시켜 생명의 빛을 뿜어내게 하는 것은 오직 제5원소, 즉 '사랑'뿐이다.

이 장면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Empedocles)의 4원소설과 놀랍도록 정교하게 맞물린다. 엠페도클레스는 만물이 흙, 물, 불, 공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을 결합시키는 힘은 ‘사랑(필리아)’이고 분리하는 힘은 ‘투쟁(미코스)’이라 했다. 우주는 사랑과 투쟁의 힘 겨루기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영화 속 거대한 악(파괴)은 투쟁의 극단이다. 엠페도클레스의 관점에서 보면, 죽어가던 제5원소인 릴루가 코벤의 입맞춤으로 깨어나는 순간은, 투쟁의 힘에 밀려 흩어지려던 4원소(네 개의 돌)가 궁극의 결합력인 사랑(필리아)을 통해 비로소 완벽한 연금술적 통합을 이루어내는 찰나다. 물리적인 네 원소를 살아 숨 쉬는 생명으로 바꾸는 열쇠는 바로 사랑이었다.


불교의 돋보기: 사대(四大)의 본질과 원융(圓融)

엠페도클레스가 ‘사랑’을 우주의 물리적 결합력으로 보았다면, 불교는 이를 한 차원 더 깊은 마음의 에너지, 즉 ‘자비(慈悲)’로 연결시킨다. 불교 역시 우주와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기본 물질을 지(地·흙), 수(水·물), 화(火·불), 풍(風·바람)의 사대(四大)로 본다. 이 사대가 완벽하게 원융(圓融, 걸림 없는 완벽한 조화)을 이루는 순간은, 물질의 기계적인 결합이 아니라 지극한 자비심 속에서 세상의 모든 파편들이 녹아들어 절대적인 진리로 현현하는 순간이다.

화엄(華嚴)의 교학에서는 이를 사사무애(事事無礙)의 원융으로 설명한다. 흙, 물, 불, 바람이라는 전혀 다른 성질의 현상(事)들이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온전히 스며들어 우주적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네 개의 돌이 각자의 에너지를 잃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거대한 빛기둥으로 합쳐지는 장면은 바로 인드라망처럼 얽혀 있는 화엄의 세계관 그 자체다.

천태(天台)의 교학에서는 이를 삼제원융(三諦圓融)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릴루가 본 전쟁의 역사처럼 흩어지고 부서지는 사대의 물질(假)은 본래 고정된 실체가 없으나(空), 그 텅 빈 자리에서 코벤이 보여준 ‘자비’라는 지극한 마음을 통해 온 우주를 구원하는 생명의 빛(中道)으로 완성된다. 즉, 원융이란 물질의 기계적인 결합이 아니라, 한 생각(一念)의 자비심 속에서 세상의 모든 파편들이 완벽하게 녹아들어 절대적인 진리로 현현하는 연금술이다.


나를 항복시키는 월요일의 돋보기

오늘 아침, 우리의 일상이라는 신전 위에는 어떤 돌들이 놓여 있는가. 우리는 남보다 더 나은 지식, 돈, 권력, 인맥이라는 사대(四大)의 요소를 모으기 위해 평생을 바치며 아등바등 살아간다. 하지만 영화가 묻듯, 이 물리적인 돌들을 아무리 많이 모아 제단 위에 올려놓은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엠페도클레스의 통찰처럼 투쟁심(증오)이 지배하는 곳에서 4원소는 흉기가 될 뿐이며, 불교의 가르침처럼 그것을 하나로 꿰어 타인을 살리고 세상을 밝히는 제5원소, 즉 ‘자비와 사랑’이 빠져 있다면, 우리가 쌓아 올린 스펙과 부는 언제든 남을 다치게 하는 차가운 흉기나 짐스러울 뿐인 돌덩이로 전락하고 만다.

세상의 악과 일상의 고통을 멈추는 힘은 외부의 영웅에게 있지 않다. 코벤의 투박한 고백이 세상을 구했듯, 내 곁에 있는 이를 향한 따뜻한 이해와 작은 친절 하나가 부딪히는 사대를 원융의 빛으로 바꾸는 기적의 시작이다. 오늘 하루, 내 주변의 차갑게 흩어진 돌들을 다정하게 녹여내는 제5원소가 되어보자.


[순야의 철학 서재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① 에리히 프롬 저 / 황문수 역,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 (문예출판사, 2019년 09월 01일): 사랑을 그저 수동적으로 빠지는 감정이 아니라, 분리되고 고립된 인간을 결합시키는 적극적인 '능력'이자 '힘'으로 해석한 현대의 고전입니다. 코벤의 사랑이 세상을 구원한 제5원소로 작용했듯, 우리 삶을 지탱하는 가장 능동적인 에너지로서의 사랑을 철학적으로 탐구합니다.

② 제14대 달라이 라마 저 / 김석희 역, 『자비의 힘(Power of Compassion)』 (열린책들, 2008년 05월 25일): 불교의 모든 복잡한 수행과 지혜가 궁극적으로 왜 '타인을 향한 자비심'으로 수렴되는지,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명쾌하고 다정하게 밝혀주는 법어집입니다. 사대의 갈등을 녹여내는 원융의 열쇠가 바로 내 마음속 자비심에 있음을 직관적으로 깨닫게 해줍니다.

③ 탈레스, 엠페도클레스 외 저 / 김인곤 외 역,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 (아카넷, 2005년 06월 20일): 만물을 구성하는 네 가지 뿌리(4원소)와 그것을 융합하고 분리하는 우주적 힘인 '사랑(Philia)'과 '투쟁(Neikos)'의 원리를 창시한 엠페도클레스의 실제 육성을 담은 1차 문헌 번역서입니다. 영화 《제5원소》의 철학적 모티브가 된 고대 그리스 사유의 원형을 그의 장엄한 서사시 구절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최고의 고전입니다.


[연재 알림]

〈순야의 돋보기〉는 매주 월요일 아침 10시, 바쁜 일상 속 잠시 머리를 식히는 지혜의 스토리를 배달합니다. 한 주의 시작을 알리는 이 짧은 글이, 여러분의 마음에 투명하고 평온한 돋보기 하나를 놓아드리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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