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을 잘 수지독송하면 먼저 받을 과보를 적게 받게 된다.
또한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며 읽고 외우더라도 만약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면 이 사람은 전생에 지은 죄업으로 응당 악도에 떨어질 것인데, 금생의 사람들이 업신여김으로써 전생의 죄업이 모두 소멸되고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분들의 가장 큰 의문 가운데 하나는 '이렇게 열심히 신(神)을 찾고 경전을 독송하고 기도하는데 일이 왜 이렇게 풀리지 않나?'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와중에 이루어지는 일들이 많이 있겠지만 자기가 대개 고민하는 가장 큰 문제는 쉽사리 빨리 이루어지지 않고 어떤 경우는 오히려 상황이 점점 악화되어가기만 하는 예가 많다.
부처님은 우리의 이런 의문을 잘 이해하고 계시므로 여기에 대한 그 수많은 이유들 가운데 하나의 이유를 금강경을 통해 일러주신다.
그것은 바로 금강경을 잘 수지독송하고 있으므로 그나마 크게 받을 과보를 적게 받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계속 나아가다 보면 마침내 모든 업장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다.
사실 누구나 자기가 금생에 받을 과보가 얼마나 큰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현실의 고통에 대해 무조건 막연하게 벗어나기만을 원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본인이나 부모 등 가족들 누군가 꾸준히 절에 나가서 기도하고 있으므로 그나마 이 정도로 살고 있는 것을 흔히 보고 있는 나로서도 객관적으로 증명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참 곤란한 경우가 많다.
신이 갑자기 나타나서 도와준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가피를 해주고 있어도 은밀하고, 또 그것이 대개 우연을 통해 현실에서 나타나므로 당사자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전생의 인과를 상세하게 일러주고 그것이 지금 받고 있는 고통과 비교해서 어떻게 전개되고, 그나마 이 정도는 본인이 열심히 착하게 살고 신앙생활을 잘해서 부처님 가피로 그렇다는 것을 알려주면 조금 받아들이는 정도이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끊임없이 인과(因果)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리고 똑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그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따라서 그 과보 역시 다양한 차원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우리 중생들이 일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마음이 바로 욕구불만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이 욕구불만을 채우기 위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렇게 욕구불만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인과법에 따라 자기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따지면 불만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자기가 한 것만큼 또 만들어놓은 만큼 자기 자신에게 오는 것인데 왜 불만을 가지고 불평을 하는가 말이다. 이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중생심은 비록 머리로는 인과법을 받아들이면서도 속으로 인과를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진정으로 인과법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자기 자신과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이 그냥 하늘에 떠서 흘러가는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무심(無心)하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름달이 쪼그라들어 그믐달로 변해간다고 억울해하고 불만을 가지고 불평을 털어놓고 화내지 않는다.
도(道)가 높아지면 마음이 지속적인 평화로 가득 차 가는 것은 바로 인과법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또 자기가 해 놓은 그 인(因)이 어떤 과정을 거쳐 과(果)로 나타나는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므로 늘 허덕이는 욕구불만이 점차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定) 가운데서 광명(光明)과 지혜(智慧)가 커지면서 점점 반야바라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일단은 스스로 인과를 깨달을 때까지 부처님과 그 가르침인 금강경을 잘 믿고 수지독송하며 신앙생활을 원만하게 잘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고 기도하는 등의 최종목표를 업장소멸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생에 지은 죄업으로 응당 악도에 떨어질 것이지만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면 그것을 비록 면해도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정도는 겪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자기의 상(相)에 붙은 욕구들을 충족시키려는 의식 차원에서는 금강경을 수지독송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금생에 사람들이 자기를 업신여긴다고 분노하고 또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부귀영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금강경을 수지독송하여 큰 과보를 벗어나고 있는 공덕을 크게 갉아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이 정도는 인욕바라밀 같은 수행으로 받아들이고 금강경을 계속 잘 수지독송해 나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자기의 여러 가지 소원 내지 욕망들이 한 가지 한 가지 이루어지니 못 이루어지니 따지면서 하는 것은 적어도 불자(佛子)에게는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들과 달리 사후에 극락에 가는 것이 최종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자기 존재 자체가 극락이 되는 궁극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법문에서 업장소멸에 대한 시간(時間) 문제가 등장한다.
금강경을 잘 수지독송하고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업장 내지 전생의 죄업에 대한 과보가 기대하는 것처럼 금방 소멸되고 확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나 자신이 천지개벽하는 것처럼 단번에 확 바뀌지 않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 내에서 살아가는 것에서 생기는 현상이다.
금강경을 잘 수지독송하여 업장이 소멸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은 나 자신이 그로 인하여 변화되어 일어나는 현상인데, 금강경으로 하여금 나 자신에게 안팎으로 변화를 일으키지 않게 한다면 수지독송하는 공덕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그리고 나 자신이 안팎으로 완전히 변화되더라도 이미 기존의 행위가 만들어놓은 과보의 현상은 시공(時空)의 법칙에 의해 부수적인 결과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부수적으로 파생되어 있는 것들까지 사라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모든 불자들의 숙원은 업장(業障)을 소멸하는 것이다. 업장소멸은 곧 상(相)의 소멸이 되고 이는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는 것이 된다.
업장이란 자기 영혼에 새겨져 있는 나쁜 기억과 더불어 장차 고통을 초래하게 되는 행위의 씨앗을 말한다.
나아가서 크게 보면 업장이란 자기 영혼의 총체적인 아상(我相)을 일컫는 것이기도 한데, 상(相)과 거기에 붙어 나오는 의식을 자기 자신으로 삼아 존재하기 때문에 힘과 지혜와 복과 마음이 한계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자기의 이런 한계를 넘어서는 현실에 처하게 되면 바로 고통을 낳게 되는 법이다.
이른바 자기 자신이 인연법(因緣法)과 인과법(因果法)의 구속을 스스로 초래하여 생기는 모든 장애이다.
그러므로 업장을 소멸한다고 하는 것은 작게는 자기 영혼과 의식에 묻어있는 악(惡)을 소멸하는 것이고, 크게는 자기 존재를 상(相)이 아니라 불성(佛性)으로 삼아가는 것을 뜻한다.
업장을 소멸하는 것은 자기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기의 모든 의식이 이미 업장의 조종을 받아 생기고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업장으로 인해 나오지 않는 의식을 순수의식이라고 하는데, 이 순수의식이 상(相)에 가려져 자기의 업장을 넘어서서 힘을 발휘하기에는 아직은 한참 힘이 모자란다. 그래서 내 생각이고 마음이라고 여기고 그에 따라 살다 보니 삶의 최종결과가 업장에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존재와 인생을 영위하는 생명체를 한마디로 중생(衆生)이라고 일컫는다.
또한 업장을 지니고 있는 자기 자신과 업장을 지니고 있지 않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분리하여 업장을 소멸하는 것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과 물을 섞은 다음 원래 각자의 물로 분리하는 것과 같으니 가능하겠는가?
그러므로 당연히 외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법인데, 부처님이나 선지식(善知識)의 도움이 바로 그것이다. 혼자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직 업장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가 요즘 들어 신앙(信仰)의 면이 쇠퇴하고 자기를 찾는 선(禪) 같은데 몰두하다 보니까 또 한쪽으로 치우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신앙과 참선수행은 절대적으로 균형을 이루어야만 도움이 된다. 두 수레바퀴 같은 것이다.
수행 없는 신앙은 맹신(盲信)으로 끝나고, 신앙 없는 수행은 허무(虛無)로 끝나고 만다.
그럼 신앙으로 부처님의 가피를 얻어 업장을 소멸해 가면서 자기 자신 또한 노력을 해야 하는데, 자기는 무엇을 스스로 수행하여 업장을 소멸할 수 있는가?
가장 손쉬운 방법은 바로 염불(念佛) 하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기도(祈禱) 역시 염불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염불은 부처님과 자성불(自性佛)에 마음의 중심과 뿌리를 두고 부처님을 부르짖으며 찾는 것인데, 부처님을 찾아도 되고 경전을 수지독송해도 된다.
그럼 염불(念佛)이 어떻게 업장을 소멸해 가는 것인가?
염불은 자기 영혼의 악(惡)을 선(善)으로 바꾸어가고 나아가 선(善)마저 넘어서 공(空)을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악(惡)은 당연히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탐욕과 집착, 그리고 무명(無明)을 말하고, 그에 따라 이미 새겨진 나쁜 씨앗을 말한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산다고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 것 자체가 이미 악이 된다. 악은 살기(殺氣)를 낳고 운명에 살(煞)로 나타나게 된다.
선(善)은 당연히 나와 타 존재를 모두 고려하며 보시와 밝은 마음으로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실천하여 좋은 씨앗을 키우는 것을 뜻한다. 선은 생기(生氣)를 낳고 운명에 복(福)으로 나타나게 된다.
공(空)은 선(善)에 대해 붙어있는 자기 자신의 상(相)을 대상으로 닦아가는 것이다. 공은 청정심(淸淨心)을 낳고 최종적으로는 생사(生死)를 벗어나게 만든다.
염불은 이렇게 나아가는 것인데, 최종적으로는 자기 영혼이 불심(佛心)을 접하여 중생심을 소멸시키고 이것은 곧 모든 업장의 소멸을 뜻한다. 이것을 심즉불(心卽佛)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염불의 이런 공덕을 성취하려면 입으로만 단지 경전을 독송하면 안 된다. 그 염불이 자기 영혼에게 직접 작용하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이 나를 찾는다고 모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하신 말씀이 이런 뜻이다.
그래서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면 업장을 소멸하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려면 진심(眞心)으로 해야 되고, 일심(一心)으로 해야 되고, 반복(反復)해야 되고, 심행(心行)해야 되고, 인욕(忍辱)해야 되고, 무심(無心)해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