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크래프트
응, 같이 다니는 누나가 이정희 누난데 둘이서 제일 잘 나가. 그 학년에선 건드릴 사람 없고, 덕포공고 성훈이 형 알지? 졸업하면 오거리파 스카우트 1순위잖아
“근데 그 누나랑 성훈이 형이 무슨 상관인데?”
정현은 마음속으로 제발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라는 말만 저 입에서 나오지 않기를 강력히 바라며 정후에게 물었다. 자기도 모르게 두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새끼, 아주 몸이 달았구나? 야, 사회 노트 먼저 내놔.”
정후는 특유의 비튼 오른쪽 입꼬리와 치켜올린 오른 눈썹으로, 이것이 엄연한 거래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없어. 내일 학교에서 줄게.”
“너 약속한 거다?”
정현이 알겠다고 했지만, 정후는 한사코 손가락을 걸고 도장을 찍은 뒤 손바닥에 사인을 하고, 제 손바닥을 양손으로 감싸듯 쓰윽 문지르며 “코팅”이라고 외친 이후에야 입을 열었다.
“잘 들어. 먼저 네가 제일 궁금해할 것 같은 것부터 말해줄게.”
평소에도 요점정리를 잘하는 정후가 오늘따라 왠지 더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뭔데?”
정현은 오랫동안 집에서만 지내던 강아지를 바깥에 풀어놓았을 때처럼, 신나기는 하는데 정작 어찌할 줄 몰라 다급해하는 마음으로 정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먼저, 소연 누나는 남자친구가 없어.”
“와 씨, 너 내 마음 읽었냐?”
정현은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정후의 솜씨에 놀라고 있을 때쯤, 녀석의 입에서 황금 같은 정보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성훈이 형이 소연 누나를 좋아했었다는 소문이 있긴 한데…”
“근데?”
“지금은 성훈이 형이 정희 누나랑 사귀고 있지. 이 정희 누나가 바로 소연 누나랑 절친이야. 그래서 소연 누나는 현재 노마크.”
“아…”
정현은 자신의 궁금증을 단 한두 문장으로 완전히 정리해 내는 정후의 능력에 감탄했다. 이쯤 되면 나중에 경찰에 계속 머물기에는 아까운 인재고, 최소한 정계 입문 정도는 고려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소연 누나가 얼굴이 좀 되잖아?”
정후가 경박스럽게 제 얼굴 앞에 손을 휘휘 흔들며 소연의 외모를 평가하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그보다도 뒤에 나올 정보가 더 궁금했다.
“그래서? 그래서 뭐?”
안달 난 정현의 모습을 본 정후의 눈이 반짝였다.
“아~~ 내가 지금 갑자기 스타크래프트가 너무 마려운데…”
“알았어, 가자.”
“진짜? 네가 게임비까지 콜?”
“알았다고, 이 자라새끼야.”
“크크크크… 좋았어~”
정후는 일단 피시방에서 자기와 두 시간 놀아주면 나머지 정보를 주겠다고 했다.
정현이 처음 가보는 피시방은 학교에서 도보로 십 분 남짓 떨어진 건물 2층에 있었다. 건물이 도로변이 아니라 골목 안쪽에 있었고, 주변 높은 건물들 사이에 가려진 음지에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꽤 음침해 보였다.
피시방에 들어가는 길에, 타 학교 교복을 입고 버젓이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이 보여 정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한 녀석과 잠깐 눈싸움이 붙었다. 눈이 마주쳤는데 피하는 것은 겁쟁이들이나 하는 행동 아닌가.
“야, 가자. 여기 어차피 피시방 안에 들어가도 담배 피우는 애들 투성이야. 신경 쓰지 마.”
“그래도 교복 입고 길에서 담배 피우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정현은 짐짓 저 담배 피우는 무리가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크게 했다. 자세히 보니 공업고등학교 형들이었다. 세 명이 거의 동시에 타는 듯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그중 한 명이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집어던지고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씩씩거렸다.
정현은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쳤다. 두려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정후와 정현은 중학생이긴 해도 웬만한 고등학생들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은 편인 데다 운동신경도 발군이었다. 사실 별로 상관이 없었다. 게다가 정후는 워낙 겉늙어서 교복을 벗기만 하면 막둥이 외삼촌과 동기동창이라고 해도 믿길 지경이었다.
그런데 정후가 옆에서 낮게 혀를 찼다.
“쓰읍… 정현아, 저런 애들 그냥 놔두고 들어가자.”
정후는 무리를 한 번 훑어보더니 목소리를 더 낮췄다.
“저쪽은 괜히 말 길어지면 귀찮아져.”
“아는 애들이야?”
“그냥… 김병희 형이 말한 쪽 애들 느낌이야. 덕포공고 쪽은 한 번 엮이면 더럽다.”
정현은 그 말을 듣고 잠깐 정후를 돌아봤다. 정후는 가끔 이렇게 자신이 아는 학교 바깥의 이름들을 아무렇지 않게 꺼냈다. 형 이름, 학교 이름, 누가 누구랑 붙었다더라 하는 이야기들. 정현으로서는 다 알 수 없는 종류의 정보였다.
“너 아는 형 되게 많다?”
“많은 게 아니라 귀에 들어오는 거지. 그리고 이런 건 괜히 엮이지 않는 게 제일 좋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후는 움찔하는 무리를 향해 까불지 말라는 듯 눈으로 한 번 쏘아 주고는 정현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정현은 못 이기는 척하며 발걸음을 다시 피시방 쪽으로 돌렸다.
좁고 어두침침한 계단을 한 걸음씩 올라갈 때마다, 정현은 나도 모르게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다만 피시방에 처음 가는 것이 불편한 티를 정후에게 들키기 싫어서, 벽에 손을 슬쩍 기대고 천천히 발을 옮겼다. 계단 벽에는 진득한 손때가 잔뜩 묻어 있었고, 군데군데 벗겨진 페인트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1층과 2층 사이에는 낡은 백열등이 달랑 하나 달려 있을 뿐이었는데, 그마저도 빛이 바래서 계단이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정현이 선 자리에서는 저 멀리 피시방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번쩍이는 불빛만이 유일한 길잡이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2층 피시방에 도착해 문을 열었을 때, 첫인상은 강렬했다. 짙은 담배 연기가 허공에 자욱했고, 곳곳에서 쌍욕이 섞인 목소리가 거칠게 오갔다. 모니터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들, 담배를 입에 문 채 모니터를 넘겨다보며 욕설을 주고받는 사람들. 정현은 순간 그 무신경한 열기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세상이 한쪽으로 무너져 내린 자리에 피시방이라는 괴물이 생겨나 사람들을 몽땅 집어삼키고 있는 것 같았다.
정후는 익숙한 듯 먼저 의자에 앉아 컴퓨터의 시동을 켰다. 삐빅 소리와 함께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본체 안에서 났다. 정현도 어색해하며 그 바로 옆자리로 향했다.
정후는 일단 모니터 화면에 떠 있는 종족 선택 창을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봐, 여기 세 가지 종족이 있지? 저그, 프로토스, 그리고 테란.”
정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뭐가 어떻게 다른 건데?”
정후는 한심하다는 듯 짧게 한숨을 쉬고는 각 종족의 아이콘을 차례로 클릭해 가며 말했다.
“저그는 괴물이야. 애들 보면 막 벌레 같고 징그럽지? 거의 병균 수준으로 엄청 빨리 퍼지고, 가격도 싸. 대신 방어가 약해. 상대방 기지에 몰려가서 정신없이 공격하는 거지.”
정현은 화면에 나오는 벌레 같은 유닛들을 보고 찡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좀 별로다… 저건 뭐야?”
정후가 이번에는 화면을 클릭해 프로토스를 선택했다.
“프로토스는 외계 종족이야. 애들은 비싸고 뽑기 힘든 대신 엄청 세고, 방어막도 있어. 막 불빛 반짝이고, 기술력도 짱이지.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잖아?”
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을 한참 봤다. 하지만 곧 시큰둥해졌다.
“멋있긴 한데 뭔가 정 안 가네. 이거 너무 먼 미래 같아.”
정후가 피식 웃으며 마지막으로 테란을 클릭했다.
“난 네가 이거 고를 줄 알았다. 자, 이 테란은 인간 종족이야. 기계랑 기술을 잘 쓰지. 쉽게 뽑을 수 있는 마린부터 시작해서 탱크, 비행기까지 다 있어. 그리고 다른 애들에 비해 전투력은 평균적이지만 전술에 따라 굉장히 강력해질 수도 있어.”
아마 이때 정후가 본 정현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을 것이다.
“오, 그럼 이게 좋겠다. 뭔가 친근하잖아.”
정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
“좋아, 그럼 테란으로 해봐. 일단 마린부터 뽑는 거야. 얘네가 기본 병력이니까.”
정현은 마우스를 움직이며 테란을 선택하고 게임을 시작했다. 화면 속에 작은 마린들이 줄지어 나오는 걸 보며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오… 이게 내 병사들이네.”
정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네가 지휘관이야. 테란의 명예를 걸고 싸우는 거지.”
“지휘관이라. 좋은데?”
두 사람은 그렇게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게임을 배우고, 또 함께 했다. 정후는 정현에게 알려 준다는 핑계로 그를 거의 가지고 놀았는데, 정현이 마린 세 기를 다 생산하기도 전에 정후의 저글링 여섯 마리와 드론들이 함께 정현의 기지에 들이닥쳤다. 마린들은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정후는 이럴 때는 벙커를 지어 막아야 한다고 알려줬다.
몇 번의 가르침을 받고 나자 정현은 어느 정도 손에 속도가 붙어 자신감이 생겼다. 어떤 게임이든 금방 배우는 게 자신 아니던가. 이번 판에는 반드시 설욕하겠다는 마음으로 입구에 든든하게 벙커를 짓고 마린 네 기를 넣어 둔 채 기다렸다. 배럭스를 추가로 건설해 마린도 마구 뽑아내고 있었지만, 기다리던 저글링은 오지 않았다.
잠시 후, 그의 기지가 폭파되고 있었다. 공중에는 처음 보는 뮤탈리스크가 떠 있었다. 벙커에 있던 마린들까지 대동해 막으러 갔지만, 뮤탈리스크의 공격에 마린들은 처참하게 전사했다. 꼭 자기 병사들이 아니라 자기가 죽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시 적의 공격은 언제나 내 생각대로만 오지는 않는다고 여기고 있던 순간이었다.
퍽.
퍽퍽.
뒤에서 예고도 없이 날아든 주먹에 정현은 얼얼할 정도로 뒤통수를 맞고 휙 뒤를 돌아봤다. 아까 1층에서 담배를 피우던 형들 중 하나였다. 그 뒤를 보니 네 명이나 더 서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컴퓨터 화면과 욕설로 가득하던 피시방 안 공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여기저기서 누가 의자를 살짝 밀어 빼는 소리가 났고, 누군가는 괜히 모니터만 보는 척했다. 아무도 말리지는 않았다. 대신 다들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정후가 반사적으로 일어나 정현 앞을 막아섰다.
“뭐야, 씹새끼들아.”
아까 담배를 집어던지고 달려들 듯한 기세를 보였던 형이 말했다.
“너네 따라 나와. 오늘 뒤졌어. 너네 경흥 중이지? 씨발놈들, 오늘 집에 못 갈 줄 알아라.”
정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까 계단 아래에서 자신들을 노려보던 눈빛과, 정후가 낮게 말했던 ‘괜히 말 길어지면 귀찮아진다’는 말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건 즉흥적으로 벌어진 시비가 아니라, 조금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던 일이었던 셈이다.
정후가 아주 작게 말했다.
“일단 나가자.”
정현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니터 속 마지막 마린 하나가 터지는 소리가 귓가에 이상하게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순순히 그들을 따라 나갔다.
그 뒤에 벌어질 일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