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쯤이었나, 지인과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할 때였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의 익숙함과폭신한 케이크 덕분에 기분도 몽글해지던 참이었다. 대체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로의 옛날 옛적이 궁금했다. 하트와 좋아요를 지나, 사람들의 얼굴이 가득히 이어지던 페이지를 넘어, 고대 유적 발굴이 가능한 도토리 숲까지 도착했을 때 멈췄어야 했는데.
SNS를 거의 하지 않았던 나는 그 사람에 비해 보여줄 사진이 거의 없었고, 쓸데없이 내 휴대폰 속 갤러리를 켰던 게 화근이었다.
"얘는 누구야? 00 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인가?"
"응? 누구요?"
"얘! 브이하고 있는-"
그분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해맑게 웃고 있는 누군가를 보고 나는 빵 터질 수밖에 없었다.
그니깐, 그건 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120만 원짜리 쌍꺼풀 수술과, 910만 원짜리 치아교정과, 150만 원의 pt로 살을 빼기 전의, 가슴께까지 열심히 기른 긴 머리를 샛노란 색으로 신나게 물들이던 대학교 1학년 시절의 나.
못 알아보다니.
"얘가 너야?" 도 아니고, "얘는 누구"냐니!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는 지인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이건 사실 나다라고 이야기하니 그분은 당황했고 나는 민망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왜 민망해했는지 한참이나 황당하고 의아해했다.
예쁘다 라는 말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못생겼다 라는 말에 상처받지 않는 사람은 또 몇 명이나 될까.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끼리 흔히 인사치레로 하는 '예쁘다'소리도 잘 못 들어서 혼자 기가 죽고, 왜 이렇게 예뻐졌냐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는 누군가에 말에 웃음이 비져 나오는 속물이다.
내가 예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마..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학교를 마치고 미술학원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학원에 먼저 와 있던 민지(가명)가 그림을 먼저 완성하고 집으로 간다길래 내일 보자며 인사를 했다. 그 친구를 보내고 그림을 다시 그리고 있는데, 뜬금없이 학원 선생님이 나에게 묻는 것이다.
"00아, 민지 참 부럽지?"
"네? 왜요?"
"예뻐서 부럽지? 너도 저랬으면 좋겠지~~"
말문이 턱 막혔다. 맹세코 나는 한 번도 그 아이를 부러워해 본 적이 없었다. 치기 어린 마음과 질투심에 부럽지 않다고 발악하던 게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나도 걔만큼 예쁘고 잘난 줄 알았다(우리 아부지는 아직도 나를 공주님이라고 부른다)! 진심으로.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통 언제 깨닫게 될까? 그 순간 내가 깨달았던 슬픈 진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나는 쟤보다 예쁘지 않다.
둘째, 예쁘다는 것은 부러워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다.
이제 더이상 나는 흔들리던 학생이 아니고, 외모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도 수없이 배웠지만, 아무리 씩씩하고 의연하고 긍정적인 척하려 해도 여전히 어려웠다. 악의 없이 나에게 던져졌던 과거의 한마디들은 끈질기게 들러붙어 머릿속을 데굴데굴 굴러다녔고, 솔직한 마음을 토해내자 결심하고 켠 노트북 앞에서도 그 시절 들었던 모든 말들을 차마 창피해서 적어 내려갈 수 없다. 마음 깊은 곳에서 열등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분은 여전히 견디기 힘들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되는 것이다.
'외모가 정말 전부가 아닌 것이 맞나?'
눈물을 글썽이며 친구들이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으려 한다는 8살짜리 아이를 보며, 당시 기간제 교사였던 나는 또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또래보다 덩치가 크고 작은 눈이 싫다며 매번 기죽어있던 아이 었다.
"어떻게 해야 그 친구들이랑 다시 잘 지낼 수 있을까요?"
정말 정말 부끄럽지만, 안타까운 마음이랍시고 그 아이를 보며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얘가 살을 뺀다면 친구 사귀기가 좀 더 쉽지 않았을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머뭇거렸던 정적의 3초를 그 아이가 제발 느끼지 않았길. 당황한 내 표정과 내 머릿속 생각을 읽지 못했기를. 뻔하고 실속 없는 말들로 한참을 용기를 북돋아 그 학생을 보낸 뒤 나는 죄책감에 한참 동안 머리를 싸맸다.
다음 날, 교실에서는 또 싸움이 일어났다. 무리에 끼고 싶어 하는 그 아이와 그 아이를 받아주려 하지 않는 나머지 친구들 사이의 다툼이었다. 나는 그 친구와 놀기 싫다는 몇몇의 아이들과 대화를 했다. 아니, 대화를 '시도'하려 했다가 좀 더 맞는 표현인 것 같다.
"00이랑 무슨 일이 있었니?"
"00 이는 짜증 나요. 저번에는 제 가위를 가져가려 했고, 말을 걸지도 않았는데 제 어깨를 치고.."
"맞아요. 걔랑 놀기 싫어요. 저번에는 자기 말에 대답을 안 해준다고 소리를 질렀어요. 그냥 못 들은 건데."
"자꾸 부르지도 않았는데 저희를 건드려요. 저번에는 저를 때렸어요."
"맞아 그래서 00 이가 너희들한테 사과한 적도 있었지. 그럼, 00 이가 너희들에게 소리 지르고 때리지 않는다면 같이 즐겁게 놀 수 있겠네?"
"... 네..."
"그럼, 너희가 먼저 다가가 보렴. 저번에 00 이도 너희를 함부로 치거나 하지 않겠다고 함께 약속했었잖아. 00 이에게 먼저 말 걸어본 사람?"
"...."
"00 이도 너희들과 친해지고 싶어서 부른 걸 거야. 너희들이 00 이에게 먼저 말 걸어본다면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야."
쭈뼛거리던 한참의 정적.
".... 근데 선생님. 사실 말 걸기는 싫어요."
"응? 왜? 왜 00 이한테는 말 걸기가 싫어?"
지금까지도 그 아이들의 입에서 해맑게 나온 말을 잊을 수가 없다.
"00 이는 못생기고 뚱뚱하니까요. 같이 놀기 싫어요."
10살만 되었어도 절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 배웠을 테니깐. 8살이기에 숨기지 않고 드러내버린 잔인하게 솔직한 마음 앞에서, 뒤통수를 한 대 거하게 맞은 것처럼 머리가 아득해졌다.
00 이가 폭력적인 행동을 멈추고 친절해지더라도, 못생기고 뚱뚱하면 놀기가 싫다는 그 아이들의 본심을 내가 대체 어떻게 설득해야 했을까? 값싼 동정을 우정으로 둔갑시켜 '그래도 같이 놀아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 맞았을까? '미'를 추구하는 생명체의 본능이 대체 뭐길래?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그 찰나에 쓸데없이 철학적인 질문까지 떠올라 혼란스러웠다.
다시 떠올리려 한참을 애써보아도 그때 내가 뭐라고 걔네들을 지도했는지 당최 기억이 안 난다. 아마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방금 한 말은 아주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 어쩐다 하며 알맹이 없는 설교를 늘어놓으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강아지들 앞에서 한참을 우왕좌왕하던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있을 뿐.
아이들은 결국 00 이를 무리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00 이의 폭력적인 행동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본능에 충실했을 뿐이고 폭력적인 00 이가 싫었을 뿐이다. 00 이도 상처받은 아이였을 뿐 결코 이상하고 나쁜 아이가 아니었다. 믿기 힘들 정도로 천사 같은 말을 할 때도 종종 있어 나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00 이는 결국 제대로 된 친구를 만들지 못한 채 2학년이 되었다. 종업식 날, 3개월 동안 고생하셨고 감사하다는 00이 어머님의 문자를 내려다보며 무력함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우리 애한테 문제가 있을까요 하면서 밤늦게 우시던 어머님의 목소리에 차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던 내가 떠올랐다.
아직도 00 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반편성 때 양해를 구하고, 그 아이들과 00 이를 최대한 떨어트려놓는 것 밖에 없었다. 교사가 싸우는 아이들을 강제로 떨어트려 놓을 수는 있어도, 싫어하는 아이를진심으로 좋아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사회화되지 않은 강아지들의 저 밑바닥 본능을 보며, 나 또한 알게 모르게 바뀌어갔다.Love yourself! 를 외치며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 하고 외친 것들과의 타협을 시작했다.
치과에 갔다. "건치가 최고다! 내가 무슨 연예인이냐?" 하며 교정은 절대 안 할 거라 뻐겼는데. 입천장과 아랫잇몸에 총 6개의 나사를 박고, 입천장에 철제 장치를 끼운 채로 1년 넘게 생활했다. 교정 과정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내가 독하다며 기함을 했다.
교정을 해도 마음에 차지 않는 하관이 신경 쓰여서 긴 머리를 단발로 짧게 잘라버렸다. 쿨톤이니 웜톤이니, 얼굴색이 환해진다는 나만의 색깔을 찾겠다며 애를 썼다. 6개월 동안 그렇게 좋아하던 디저트들을 모두 끊은 채 양배추와 두부를 주식으로 삼으며 미친 듯이 운동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 와중에 쌍꺼풀 수술을 다시 해볼까, 코에 필러를 넣으면 어떨까 속으로 고민했다. 내가 아무리 살을 빼고 꾸민다고 해도 절대 될 수 없는 '모태 초절정 하늘하늘 갸녀린 미녀'들을 보며 한탄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외모가 전부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초등학생에게 가르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아니, 애초에 교사인 나도 그 명제에 확신을 가지고 있긴 한 건가? 아름다운 것을 좇는 아이들의 모습이 '인간의 본능'인 것인지, 다 커 버린 어른들이 주입한 '사회화의 산물'인지 아직도 나는 답을 얻지 못했다. '못난' 외모가 유머 소재로 쓰이고, '잘생긴 게 최고야!'라며 겉모습을 찬양하는 수많은 미디어 매체 앞에서 무력하게 기가 죽는 자신을 볼 때마다 나는 부끄럽다. 나는 과연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해 아이들에게 가르칠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나는 아직도 외모에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만큼은 '외모가 전부가 아니다'라는 누군가의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단단한 미소를 짓는 학생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나마 내가 교실에서 얻은 한 가지 확신은, 특별히 아끼는 마음이 생기는 순간부터는 아이들의 외모 따위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교실 속 모든 존재들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눈부시다. 겉으로 보이는 것의 권력과 힘은 생각보다 크지만, 진실되게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외모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교실에서 아이들을 마주하며 처음으로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