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나는 교회에서 ‘부결 섬김이 훈련’이란 걸 받았다. 한마디로 일종의 부리더 훈련 같은 건데, 리더에 대해 이야길 나누다가 나는 되려 이런 말을 했다. “좋은 기독교 리더상을 본 적이 많이 없어요. 그래서 잘 모르겠어요.”라는. 이에 대한 질문은 이전부터 많이 해왔으나 답이 명확하지 않아 늘 의문이었다.
부결 섬김이 독후감 과제로 읽게 된 <리더가 리더에게(IVF)>를 보아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책을 처음 펼쳤을 땐 뭔가 대단한 걸 알려줄 줄 알았는데. 책을 덮을 땐 ‘그래서 뭐 어쩌란 걸까... 더 헷갈리는군’ 싶었다. 말투는 은혜스러웠지만 내게 은혜로운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답이 숨어있었던 것도 같다.
생각이 꼬리를 물어 여러 생각을 하던 와중, 리더를 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그리 큰 조직은 아니었더라도 크고 작게 책임을 경험했고, 책임의 자리에선 ‘비판을 달게 받을 줄 알아야 한다’고 자연스레 생각해온 나를 마주했다. ‘왜?, 리더를 한다는 건 욕먹기를 감수하겠다는 의견까지 포함하여 결정 내려야 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게 원래 목적은 아니었을 텐데.
가까운 이든, 먼 사람이든 신격화하거나, 오고 가는 이야기 없이 함부로 재단하는 일은 쉽게 발생한다. 연예인이나 정치인에 대한 무한 신뢰나 집단 안에서 ‘00은 00할 거다’라는 밀도 높은 신뢰는 살다 보면 자연스레 하게 되니까. 두말할 것도 없는 것이, 우리 사회에 내재된 00상은 뿌리가 깊다. 여성상/ 남성상, 부모상, 존경하는 스승상, 상견례 프리패스상. 그중에는 ‘좋은 리더상’도 있다.
다시 되뇌어 보자. 좋은 리더상은 무엇인가. 음, 사실 그런 건 없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듯, 모두에게 좋은 리더가 될 순 없다. 어떤 상사의 마음에도 쏙 들어맞는 후임이 없듯, 똑같다. 집단은 그저 동일한 목적성을 둔 다른 이들의 결합/만남이다. 때문에 결국에 집단이 해야 할 것은 좋은 리더상에 집착하기보다, 좋은 공동체는 무엇인가, 좋은 사회는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더 하는 것이다.
한쪽에서만 노력한다고 좋은 집단이 될 수 없고, 좋은 관계성을 쌓아 올릴 수 없다는 건 쉬이 알지만, 원래 내가 그렇게 살아내긴 어려운 거 아니겠나.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필요하다. 결국 사회는 소수의 책임이 아닌 다수의 연대로 흘러갈 때 개별성과 고유성을 이해할 폭이 넓어진다. 더욱 다채로운 세상을 위해선 질문하지 않아 왔던 당연한 것들에 질문을 던짐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게 아닐는지. 더 다양한 목소리는 그 변화로부터 시작된다고, 나는 믿는다.
사실 생각해 보면 리더가 팀원에게 원하는 건 없을까, 생각해보면 있을 것이다. 때론 잘못된 모습으로 전달되어 ‘갑질’이 되기도 하지만, 크고 작은 조직에서 리더들은 말하지 않는 편을 택할 것이다. 더구나 그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것 자체가 조심스럽고, 나눌 이도 없을 터. 이러한 구조는 리더를 ‘외롭게’ 만든다. 집단 내 외로움은 집단을 건강하게 이어나갈 수 없다. 그런 류의 외로움은 당연하지 않다. 그래선 안된다는 것을 명심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 누구든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굳게 믿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