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를 준비하고 있는데 양치를 하고 온 둘째 아이가 침대 위에 얼른 눕더니 발을 내 얼굴 쪽으로 들이민다. 스토리 타임을 위해 두 아이가 각자 골라놓은 책들과 둘째 아이 얼굴을 번갈아 살피며 잠시 머뭇거린다. 졸지 않고 저기 쌓여있는 책들을 다 읽어주고 자려면 일초라도 빨리 움직여야 한다. 현실은 이상과 달라서 엄마가 명료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주고 아이는 스르르 잠드는 마법 같은 일은 우리집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한 아이가 잠들어도 나머지 한 아이는 말똥말똥하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가? 침대에 몸을 뉘이기만 하면 잠이 쏟아진다. 혼신의 힘을 다해 잠을 떨쳐내려고 해도 마지막 한 두 권을 남겨두고는 잠과의 사투를 벌인다. 근육이 명령을 받아 한 문장을 소리 내어 말하는 동안 의식은 잠의 세계에 3-4초쯤 머무른다. 아늑하고 아늑하다. 눈치 빠른 아이는 톡톡 어깨를 두드리며 “엄마, 힘내!”라고 말한다. 온 힘을 다해 의식을 각성 상태로 끌어올려보지만 몇 분 간격으로 같은 일이 반복된다. 이쯤 되면 그만 자고 내일 읽자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아이가 야속하고 또 야속하다. (주말 부부인 관계로 집에 미션을 대신해줄 이가 없다.) 엄마가 졸려서 그러는 건데 그것도 이해 못 해주냐고 화낸 적도 몇 번이나 되니 말 다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니 나의 깜냥이 그것밖에 안 되다 보니 평화로운 하루의 마무리를 위해서는 속히 낭독 미션을 끝내는 것이 상책이다. 발 마사지 요청은 딱 잘라 거절해야 한다. 매몰차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코 앞에서 작은 발가락들이 꼬물거린다. 나는 또 마음이 약해진다. 화장대 위 통통 납작한 연두색 통을 가져와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든 크림을 검지 손가락 끝에 폭 찍어 아이 발바닥과 발등에 톡톡 두드려 발라주고 가볍게 꼭꼭 누른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산전후 교육이란 걸 받지 못한 나는 유튜브 영상을 보고 베이비 마사지를 배웠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유튜브에서 참으로 많은 것들을 배운다. 어설펐지만 하다 보니 나름의 요령이 생겼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목욕 후에 매번 해주다가, 점점 빈도가 줄어 종종, 가끔, 드물게 아이들이 요청하면 해주게 되었다. 아이들은 간지럽다고 온몸을 뒤틀면서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발을 내미는 행위에 대하여. 용기도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연스러움’ 그 자체에 대하여.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이야기가 나온다.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예수님의 이야기 말이다. 나는 어쩐 일인지 그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의 태도보다는, 예수님이 발을 씻어 준다고 했기로서니 곧이곧대로 발을 내어준 제자들의 행동에 놀란다. 상징 가득한 텍스트를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스스로가 어처구니가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만약 예수님의 제자였다면 발 안 씻겠다고 도망쳤을 것 같다. 사모하는 존재에게 발을 내미는 일, 가리고 싶은 허물을 드러내는 일.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사랑이라는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첫걸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기초도 없는 엄마에게 척하고 발을 내밀고는 한껏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아이들이야 말로 나의 참 스승이구나 싶다. 허지만 나는 서둘러 마사지를 마무리한다. 스승과 나의 참 평화를 위하여 나는 밤이 더 깊기 전에 낭독 미션을 완료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