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가을이 찾아온 9월 말. 만리포 해수욕장을 지나는 길 곳곳에 핀 벚꽃을 보았다. 비록 봄에 피는 벚꽃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상당수의 벚꽃은 꽃잎을 활짝 열고 떨어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란스럽게 꽃 숲을 이루는 구경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조용히 인적이 드문 도로에 홀로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고 있노라니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피는 꽃’도 아니고 더구나 ‘특별히 오늘을 위해 피었습니다’ 이런 식도 아닌 가을벚꽃이 새삼스러웠다. 비 오는 날, 바람 부는 날, 폭풍이 치는 날, 추위와 더위, 이런저런 날들을 묵묵히 버티고 혼자 조용히 피어 있다는 그런 자연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멈춰 섰다.
왠지 마냥 반갑고도 애잔한 마음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훌륭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구나.” 이것도 아닌 “어머나, 가을 벚꽃이 이런 데 있었구나.” 하고 외치고 싶은 그런 기분이 이었을까. 동시에 스스로 내 감정을 산뜻하게 읽어낸 것에 대한 우아한 기분을 만끽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것이 지난 태풍 곤파스의 영향으로 나뭇잎이 떨어져 영양분을 축적하기 위한 벚꽃 나무들의 자구책이라는 것을 알고 나의 이 무식한 우아한 상념은 생태정보의 무지함으로 초라하게 끝났다. 물론 그것은 나무의 탓이 아닌 자연생태의 본능이었지만, 특별하고 아름답게만 보였던 나의 가을벚꽃이 순간 초라하고 밉게만 보였다.
벚꽃은 원래 봄철 따뜻한 기후 나뭇잎이 다 떨어지면 자연히 꽃이 따라 피는 형태인데, 태풍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온난현상으로 나뭇잎이 다 떨어지자 그것이 꽃을 피우라는 신호로 착각한 몽우리가 광합성 작용을 하기 위해 꽃을 피운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나무가 생육기능이 저하된 상태로 내년 봄에 꽃이 필 영양분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을 초래했기 때문에, 애석하게도 내년 봄 벚꽃 철에는 이 나무에서 꽃을 볼 수 없을 거라 한다.
실제 우리나라 근대적인 기상 관측 기록에 가장 강력할 뿐만 아니라 가장 큰 피해를 남겼다는 사라호 태풍이 있었다. 사라호도 이번처럼 추석에 일어났던 태풍이라 한다. 옛 어른들은 가을벚꽃을 흉조라고 여겼는데 그것은 실제로 그다음 해의 보릿고개를 그 어느 때보다도 지독한 배고픔으로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무지한 나는 이것이 올해에만 나에게 일어난 특별한 일이라 자부하며 우아한 상념에 들떠있었던 것이다.
가을벚꽃, 그것은 나에 대한 치욕적인 우롱이요, 태풍보다 더한 폭력이자 배신이었다.
사랑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일까 아니면 한갓 우연의 소산일까. 모든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에 남들과는 다른 독보적이며 예외적인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러나 따져 보면 사랑처럼 진부하고 흔한 스토리도 달리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사랑에 빠지고 때로 사랑 때문에 죽음조차 불사한다.
사랑하는 어떤 사람들은 분명 가을임이 분명한데도 나뭇잎이 떨어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혼자 서둘러 꽃을 피운다. 내가 가을벚꽃에 당한 치욕을 사랑에 덮어 씌우려고 하는 것일까? 그렇다. 나는 사랑을 낭만화하고 절대시 하려는 태도에 딴죽을 걸고 있는 것이다. 사실 헤어져 돌이켜 보면 우리의 만남은 ‘첫눈에 반했다’ 식의 낭만적인 사랑의 점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우리 두 사람이 결국 연인으로 맺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나의 사랑의 특별함과 위대함에 대한 반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 혹은 ‘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게 된 계기가 순전히 오해의 산물임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사랑이 기초에서부터 허술하기 짝이 없는 ‘부실공사’였음을 고발하는 것만은 아니다. 나는 사랑이 주는 착각의 달콤한 환상을 나무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 봄이 아닌 가을이라는 상대에게 미리 꽃을 피워 버림으로써, 생육기능이 저하된 상태로 정작 내년 봄에 꽃이 필 영양분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을 초래하는 비극을 미리 막아보자는 것이다. 사랑이라고 생각되는, 상대가 주는 기호들을 조금만 더 이성적으로 감지하고 분석해봄으로써 말이다.
나는 이제껏 나뭇잎이 떨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섣불리 꽃을 피워버린 몽우리였던 것이다. 특별하고 아름답게만 보였던 가을벚꽃이 초라하고 밉게 여겨졌던 것도 아마 그것이 바로 내 사랑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리라.
오해에서 비롯된 표정을 담고 있는 여자의 얼굴과 잠이 덜 깬 남자의 몽롱한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두 사람은 ‘그들 사이에 아주 특별하고도 위대한 일이 시작되어 버렸음을 확신하게’된다. 시작된 오해는 복제와 확대를 거듭한 끝에 남자와 여자 모두 상대방이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결론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나는 한 번쯤은 두 연인의 심리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비커에 담아 분석함으로써 ‘특별하고도 위대한 연인’이 결별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냉혹하게 서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역사상 사랑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리스 시대부터 지금까지,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나고 반복되는 건지도 모른다. 나도 그도 다른 인류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뭔지는 몰랐다. 다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음으로써 이것이 사랑이구나, 긍정적으로 착각하고 싶은 것이었다. 사랑이란 여태껏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기표와 기의가 일치할 수 없는 착각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인생을 들었다 놨다 하고 인간의 역사도 바꾸는 큰 착각 말이다.
지혜는 <나>와 <너>를 대등한 존재로 파악했을 때 발생하는 끈적끈적한 상생의 분비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너>가 있으므로 해서 <나>가 빛날 수 있다는 인식 이전의 감각적인 앎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따라서 그것은 대립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도 아니며 시종일관 공존이요 상생이며 상보적이다. 그래서 나는 이 상생이며 상보적인 계산을 한번 해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다. 이것의 경계를 굳이 짓자면 간계와 탐욕이라 할 수 있겠다. 간계와 탐욕을 넘지 않는 선에서 침착한 사랑의 계산은 필요하다.
간계는 탐욕의 끝없는 확산으로 눈이 멀어졌을 때 발생하는 철저하게도 폐쇄적인, 역설적이게도 냉철한 이성적인 계산이다. 자, 여기서 한 번 생각해보자. 사랑으로 눈이 멀어버린 자가 이성적인 계산을 했다면, 그 계산의 결과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탐욕에서 시작된 착각은 그 행진을 멈추지 않는 한 반드시 광기를 띠게 되어 있다.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까닭으로 주변 상황의 변화를 이해할 수가 없고 그래서 미쳐 날뛰다가 종당에는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자기가 빠져버리는 방식으로 멸망해 간다. 마치 그 멸망의 끝에 무엇인가 다른 거대한 탐욕의 소재라도 있다는 듯이 그렇게.
우리는 간계와 탐욕의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사랑의 착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 좀 더 분석적으로 사랑의 기호를 감지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경계를 넘지 않고 늘 지혜롭기가 힘든 일이기는 하나, 그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자체만이라도 큰 도움이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사랑의 아픔에서 보호할 수 있는, 초라한 방어막이기 때문이다.
가을에는 벚꽃이 아닌 단풍이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른 가지를 뚫고 피어난 벚꽃이 마치 희망을 상징하는 것이라 애써 해석하는 애석함. 흉조임이 분명한 기록이 있었음에도 마치 그 전례를 알지 못했던. 어쩌면 그러한 전례를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르지만. 이상기온으로 인해 제 철도 모르고 벚꽃이 피었지만 길조로 여기고자 하는 ‘억지’ 혹은 ‘무지’. 나뭇잎이 떨어졌다고 서둘러 나 홀로 꽃을 피우는 벚꽃이 아닌 내가 되는 그날을 감히 꿈꿔본다. 내년 봄에 찬란히 빛날 그날을 위해서.
내가 오해한 ‘사랑의 치욕’을 ‘생태정보의 무지함’으로. 마치 사랑의 상처를 감미롭게 터치하려는 듯 포장하는 내가 조금은 가련해 보이지만, 뭐 어찌하겠는가? 비록 나 스스로 상대방이 내비치는 사랑의 기호들을 더 이성적으로 분석하자 했지만 사랑이란 정말 여태껏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기표와 기의가 일치할 수 없는 착각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인생을 들었다 놨다 하고 인간의 역사도 바꾸는 큰 착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