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2)

by Merry Christmas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깨버렸다. 3번과 4번의 상태가 좋지 않아 자면서도 걱정이 되었나 보다. 소리 나지 않게 살그머니 내 침상의 커튼을 열어보았다. 새벽 어스름의 병실은 고요했다. 낮게 코 고는 소리가 들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뒤척거리는 소리도 들리더니 물 마시는 소리도 들려왔다. 2번, 3번, 4번에서 모두 인체의 움직임이 감지되자 나는 소심하게 안부를 확인했다.


"다들... 굿모닝?"


말 건네기가 무섭게 4번 침상을 가려 놓았던 연한 주황색 커튼이 차르르 걷히더니, 옆으로 누운 것도 바로 누운 것도 아닌 자세의 효진 씨가 보였다.


"친구, 나 지금 이 자세 일광욕하는 바다표범 같지 않아?"


농담할 정도의 기력은 있구나 안심이 돼서 웃음이 나왔다. 사실 바다표범 같았다.


"저도 잘 잤어요."


바로 옆 3번 침상의 커튼도 차르르 걷어지며 어느새 몸을 일으켜 앉은 려원 씨가 청초하게 웃었다.


우리는 모두 무사히 아침을 맞이한 것이다.

다만, 효진 씨의 상태는 아직 좋지 않았는데 라보파를 최대 용량으로 맞고도 여전히 수축 강도가 줄지 않고 있었다. 바다표범 일광욕 자세가 가장 편한 모양인지, 그 자세로 숨을 몰아쉬고 손을 떨면서도 말 만은 계속하고 있었다.


"아.. 밥 온다. 려원 씨는 오늘 수술이라 금식이지? 진짜 배고프겠다. 나도 배고픈데 속이 울렁거려서 밥을 못 먹겠네. 임산부가 잘 먹어야 되는데. 투썸 스초생(소트로베리 초코 생크림 케이크) 먹고 싶다. 먹으면 안 되겠지? 출산하면 먹을 목록에 써놔야지. 3번 동생은 임당(임신당뇨) 아니라서 먹어도 되잖아. 아! 이따 동생 남편 올 때 사 와주시면 안 될까? 냄새만 좀 맡아보게. 우리 남편은 오늘 못 오거든"


"냄새만 맡고 안 먹는 게 되겠나."


나는 'T'라서 스초생이 왔을 때 우려되는 바를 사실적으로 전달했다.

부탁을 받은 려원 씨가 곤란한 듯이 웃더니 남편이 오늘 못 온다고 말했다. 보호자 없이 수술을 한다고? 그게 되나? 스초생을 상상하며 밥을 먹던 우리들의 숟가락이 일제히 멈추었다. 려원 씨는 우리가 놀란 모습을 멋쩍은 듯 모더니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혹시 코로나 확진되셨어?"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애들 봐야 돼서요."


광주에서 경기도 화성이 멀긴 하다. 첫째 둘째도 분명 어릴 것이다. 양친 네 분 모두 작고 하셨을 수도 있다. 어떤 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그래도 아이를 가진 아내가-심지어 셋째를!-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수술을 하는데, 입원해서부터 수술까지 혼자 두는 남편이 선뜻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저 한 번 해봐 가지고요. 혼자 잘할 수 있어요."


려원 씨는 걱정 말라며 씩씩하게 웃었다. 그런다고 걱정하지 않을 우리가 아니었다. 2번 아중씨도 나도 맥수술을 해봐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술실 들어갈 때의 공포와, 혹시라도 잘못되면 어쩌지 하는 불안과 압박감. 무엇보다 수술 직후에는 소변줄을 꽂고 누워 거동을 하지 못한다. 제왕절개 하고 난 직후의 상태와 아주 비슷해지는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보호자 없이 견디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우리가 걱정을 하든 우려를 하든 려원 씨의 보호자는 정말로 오지 않았고, 항상 진료실에 갈 때 휠체어로 우리를 데려다주시는 여사님이 오셨다. 려원 씨는 해사하게 웃으며 "잘하고 올게요.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손을 흔들며 병실을 나갔다.

려원 씨가 문 밖으로 나가 보이지 않자, 아중씨가 가장 먼저 이이를 제기했다.


"언니들. 내가 아직 아기를 안 키워봐서 그런데, 정말 애가 둘이면 아빠가 여기를 못 올 정도예요?"


"동생~나도 한 명 밖에 안 키워봐서 모르겠어... 아야야...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거 같긴 해. 그치 친구?"


그렇게 물어본다고 해도. 나도 한 명이라 모르겠다. 내 대답여하에 상관없이 이건 아니지를 반복하던 효진 씨는 연신 '에구구, 에구구, 아야아야'를 반복하더니 간호사를 불러 수축검사를 해달라고 했다.

그래. 615호의 문제는 3번만이 아니었다. 4번도 진행형이었다. 효진 씨는 이제 몸도 떨고 숨도 헐떡거리고 있는데도 여전히 진통이 줄지 않고 있었다. 아니,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그 활발하던 친구가 말없이 움직이지도 않고 끙끙 앓고 있는 것은 무섭고 이상한 느낌이었다. 수축검사를 하는 동안에도 아파서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결과를 본 간호사가 '안 되겠는데...'를 중얼거리더니 밖으로 나가고 곧 다른 약으로 바꾸어 달았다. '라보파' 대신 '트랙토실' 처방이 내려진 것이다.


트랙토실. 그것은 참 신비한 약이었다. 아이 낳는 진통처럼 몸을 떨며 끙끙거리던 효진 씨가 트랙토실을 맞은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호흡이 안정되더니 손도 떨지 않고 안색도 좋아졌다. 라보파 최대 용량으로도 잡히지 않던 수축이 단번에 잡혔다. 트랙토실의 효능을 처음 본 나로서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좋은 약을 왜 이제 주는 건데?"


이해불가였다. 이 약은 라보파의 최대 부작용인 폐부종이나 호흡곤란도 없다는데 처음부터 이걸 맞으면 안 되는 걸까?


"비싸서 그래요 언니. 비보험이거든요."


모든 것을 아는 눕신이 나에게 또 지식을 한 움큼 주었다.

아. 그렇구나. 어쩐지 좋더라. 경험상 좋은 약은 항상 비보험이었다. 그래도 어지간히 비싸지 않은 다음에야 폐에 물 차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라는 나의 무지(無知)한 생각은 트랙토실 가격을 듣자마자 공기 중에 흩어져버렸다.


트랙토실 한 사이클이 50만 원이었다. 한 사이클이면 용량에 따라 이틀에서 삼일 못 미치게 맞을 수 있다고 한다. 첫 3 사이클 까지는 보험이 적용되어 7만 원이라는데, 그나마 34주가 넘으면 적용이 되지 않는다. 효진 씨의 아기 요미는 지금 33주 2일이다. 최대 안전주수인 38주까지 맞는다고 보면, 러프하게 계산을 해도 약값만 600만 원이 넘는다. 만약 26주인 내가 맞는다면 비용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냥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저 처음에 입원 갖 했을 때... 언니 자리에 있던 언니는 트랙토실만 맞아서 병원비 4000만 원 나왔어요."


커헉.


"그래도 40주에 낳았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맞다. 수천만 원이 들어도 자식을 살릴 수 있다면 감사할 일이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람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법.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이게 곧 나의 일이 될 거라는 사실을.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16화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