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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녀의 인생철학 Oct 24. 2021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해님 달님 속 숨은 메시지(8)

하늘에서 내려준 두 종류의
동아줄


이제 곧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게 된 오누이의 온몸이 떨렸죠.
목숨이 달려있는 그 순간 하늘을 보며 빕니다.

"신령님, 호랑이가 우리 엄마를 잡아먹고 이제 저희까지 잡아먹으려 해요. 제발 살려주세요."

하늘을 쳐다보며 간절히 소원을 비는 오누이에게
하늘에서 동아줄 하나를 내려줍니다.
오누이는 얼른 그 동아줄을 잡고 하늘로 올라가죠.
곧이어 나무에 오른 호랑이도 똑같이 하늘에게 빕니다.

"신령님, 저에게도 빨리 줄 하나 내려주세요."

이런, 호랑이에게도 동아줄 하나가 내려옵니다.

"허허, 이것 봐라. 나도 똑같이 올라간다. 너희 딱 기다려."

그러나 호랑이의 동아줄은 썩은 동아줄이었죠.
얼마 지나지 않아 호랑이가 잡고 있던 동아줄이 끊어져 버렸어요.




당신의 행복은 무엇입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은 금전적인 어려움 없는 삶을 바라실 테지요.

외로움이 싫으신 분들은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싶으실 테고요.

저처럼 건강을 잃으신 분들은 건강한 육신을 원할 테지요.


그럼 잠시 이 행복이라는 단어를 좀 살펴볼까요.




제가 학교에서 상을 타 왔어요.

친구들에게 자랑을 합니다.


"나 오늘 학교에서 상장받았다."


이럴 때 우린

"와 축하해."라고 하죠.

혹시

"우와 다행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 계신가요?

우리는 이런 기쁜 이야기에 다행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제가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어요.

잠깐 한눈 팔고 다른데 보느라고 발걸음을 멈춘 순간,

바로 코앞으로 오토바이가 아주 무서운 속도로 지나갔어요.

친구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나 여기 오는 길에 하마터면 오토바이 사고 날 뻔했지 뭐야."

"와 천만다행이다."


이렇게 나의 목숨과 관련 있는 일에 우리는 다행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런 '다행(多幸)의 행(幸)''행복(幸福)의 행(幸)'은 같은 한자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행복의 단어는 굉장히 광범위한 부류를 포함하고 있겠지만,

이 '다행'이라는 단어처럼,

행복이란 단어는 결국 우리의 목숨과도 관련된 의미도 포함되어 있어요. 우리가 누리는 그 모든 행복도 나라는 존재가 있기에 누릴 수 있는 것이니깐요.


목숨이 달린 일에는 누구나 하늘을 찾는 법인가 봅니다.

종교가 없는 무교인이라도,

본인이 바라는 일이 있으면 모든 신을 다 찾죠.

"하나님, 부처님, 예수님, 공자님, 알라신, 성모 마리아 님, 제 소원 좀 들어주세요."


드라마에서도 종종 보죠.

"암입니다. 3개월을 못 넘길 것 같네요."

이 말을 듣고 나온 주인공이 하늘은 보며 중지를 올려 욕을 합니다. 그리고는 잘못했다며 모든 신을 부르며 살려달라 울부짖죠.


앞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의 수명을 담당하고 있는 신명이 있다는 것을 우리 무의식은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비록 신의 존재 따윈 안 믿는다는 무교인들 조차도 이럴 때 꼭 찾게 되는 걸 보면 말이죠.


이 두 오누이도 곧 죽을 운명에 닥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간절하게 빌었을까요. 목숨이 달려 있는 그 간절함이 하늘이 닿아 하늘은 오누이를 살려줄 동아줄을 내려줍니다.

아마 이토록 간절한 마음이 아니었다면,

동아줄이 내려오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렇게 목숨을 구해줄 동아줄을 잡고 오누이는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호랑이도 하늘에게 빕니다.

동아줄을 내려달라고.

그런데 호랑이에게도 동아줄이 내려와 버리죠.

썩은 동아줄을 말이죠.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가 나오죠.

저는 호랑이에게는 동아줄을 내려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러나 하늘은 호랑이에게도 동아줄을 내려줍니다. 그리고 그 동아줄을 잡고 끝까지 오누이를 따라오죠.


중요한 메시지는 호랑이에게도 내려온 이 동아줄입니다.

하늘에 빌면, 하늘에 비는 그 마음이야 어찌 됐든

동아줄은 내려오는 법이지요.

그 잡은 동아줄이 나를 살려주는 동아줄인지,

호랑이가 잡은 동아줄처럼 끊어진 동아줄인지는 그 줄이 끊어져봐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내가 과연 나를 살려줄 동아줄을 잡고 있는지,

아님 곧 끊어져 떨어질 동아줄을 잡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아이들은 아주 간절히 본인들이 살아남기 위한 아주 순수한 마음으로 하늘에 빌었습니다.

그러나 호랑이의 마음은 달랐죠.

본인이 살기 위한 순수한 마음이 아닌,

아이들을 잡아먹기 위한 사심으로 하늘에 빌었습니다.

결과는 참혹하죠.

순수한 마음으로 빌었던 아이들은 결국 살아남아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고, 사심 가득한 마음으로 빌었던 호랑이의 동아줄을 끊어져 추락하게 되죠.


이는 하늘에 빌 때 나의 마음이 아이들처럼 순수한가,

사심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비는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마음은 일신(一身)의 주(主)이니 사람의 모든 언어 행동은 마음의 표현이다. 그 마음에는 양심(良心), 사심(私心)의 두 가지가 있다. 양심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이요, 사심은 물욕(物慾)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慾心)이다. 원래 인성(人性)의 본질은 양심인데 사심에 사로잡혀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언동(言動)을 감행하게 됨이니 사심을 버리고 양심인 천성을 되찾기에 전념하라. 인간의 모든 죄악의 근원은 마음을 속이는 데서 비롯하여 일어나는 것인즉 인성의 본질인 정직과 진실로써 일체의 죄악을 근절하라.

『대순진리회 요람』, pp.18~19.


사심이라 함은 물욕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이라고 합니다. 과연 내가 바라는 행복과 소원이 양심과 인간의 본성인 천성을 되찾는 일에 집중이 되어 있나요, 아님 물질에 향한 소유욕에 집중이 되어 있나요?


지금보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경제력이 뛰어난 배우자, 돈을 많이 벌게 해주는 직장 등등

과연, 이렇게 하늘에게 빈 소원이 과연 순수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혹시나 그런 물질적인 소원을 빌어 이루어졌다고 해요.


현명하지 못한 부모님의 경우

자식이 사탕 달라고 떼를 쓰면, 이가 썩어가고 있는데도 떼를 쓰면 그냥 사탕을 주겠지요.

경제관념이 생기든 말든 걱정 없이 용돈 달라고 할 때마다 그냥 주고 말겠지요.

그게 정말 아이를 위하는 일일까요?

그 점이 결국 먼 미래에 아이들이 독립성을 가지기 못하고 나약한 사람이 되게 만들어 버리진 않을까요?


그러나 현명한 부모님은 다르죠.

사탕을 사달라고 떼를 쓰는 아이에게 사탕을 사주겠다며 치과를 데려갑니다. 난 분명 달콤한 사탕을 원했는데, 부모님은 치과의 고통을 안겨줍니다.

그렇게 충치가 생기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준 후 달콤한 사탕을 손에 쥐어줍니다.


용돈 달라고 떼를 씁니다.

현명한 부모님은 그냥 주지 않죠. 그 돈을 벌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해야 되는지, 그 힘들게 번 돈을 어떻게 활용해야 되는지에 대해 경제관념을 알려준 후 용돈을 주게 됩니다.




하늘에 비는 마음은 이 아이들처럼, 티끌만큼의 욕심, 사심이 없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물질 세상이므로, 살아가기 위한 적당한 물질은 필요한 법입니다만, 나의 천성과 양심을 뒤로 한채 내가 가지지 못한 물질과 소유에 대한 충족만 빈다면, 과연 그 마음이 순수한 마음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해님 달님 동화에 나오는 엄마는 악한 인물로 등장하지 않았죠. 남의 잔칫집에 일 도우러 가 잔치가 끝날 때까지 성심성의껏 일을 도와 떡을 받아온 아주 멋진 엄마였죠.

그러나 결국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는 신세가 됩니다.


2009년에 개봉된 SF 미스터리 영화
'노잉'

1959년, 한 초등학교에 심어진 타임캡슐의 종이에 쓰인 내용이 지난 50년간 지구에 일어난 재앙인 것을 알아차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고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다 세상의 종말을 맞이하게 되고, 알 수 없는 미래의 메시지를 받던 아이들만 새로운 세상으로 살아남게 되는 스토리의 SF 미스터리 영화


이 영화에서도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성인들은 세상의 종말을 동시에 맞이하게 되고, 어린 두 아이만 새로운 세상에 살아남는 이야기로 전개되어 마무리됩니다.


결국 아이들만 살아남게 되느냐는 아닙니다.


해님 달님과 영화 '노잉',

여기서 살아남게 되는 아이들은 그만큼 때가 묻지 않은, 사심이 없고, 선입견이 없는 순수한 존재를 나타낸 것입니다. 지나가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티 없이 맑은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죠. 세상을 오래 살면 살수록 세상의 풍파를 견뎌내며, 아무래도 세상의 사심과 어둠이 자연히 깃들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내가 그 사심에 묻혀 살고 있는지, 그 사심을 버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가 중요하겠지요.

어린아이들처럼 내 마음의 순수성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이유이지요. 썩은 동아줄을 잡고 싶지 않다면 말이죠.


지금 내가 잡고 있는 줄이 생명줄인지,

썩은 동아줄인지 매 순간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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