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봉 자연휴양림(경북 상주 소재)에 다녀왔다. 아주 멋진 곳이었다. 잠깐 둘러보았지만 숲이 아름다웠다. 그곳에서 난생처음으로 노각나무 꽃을 만났다. 흰빛의 통꽃이 가장 빛나는 순간을 뒤로하고 올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많은 꽃들이 통째로 떨어져 푸른 쇠뜨기 밭에 누워있는 모습은 감동이었다. 꽃이 통째로 떨어지고 꽃 모양도 동백과 비슷하여 여름동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소속은 차나무과였다.
공원이나 수목원의 잘 가꿔진 꽃들을 보는 즐거움도 크지만 숲이나 들에서 노각나무 꽃처럼 우연히 만나면 즐거움에 설렘까지 더하게 된다. 처음 꽃에 빠졌을 때가 생각난다. 사십 대 초반의 일이었다. 그 당시 부천시 역곡에 살았는데 우리 집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구로구 궁동이었다. 궁동에 야산이 있었고 그곳으로 산책을 자주 갔었다. 그때 나는 가는 길에 핀 풀꽃과 야산에 핀 꽃들이 무슨 꽃인지 궁금해졌다. 마침 김태정 님의 화보가 곁들인 야생화에 대한 책이 3~4권 있었고 꽃을 보면 집에 와서 그 책을 뒤져서 꽃의 이름을 알아냈다. 그때는 폰도 카메라가 없는 일반폰이어서 기억에 의존해서 알아냈었다.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열정이었는데 꽃들을 알아가는 것이 그리고 꽃들을 바라보는 것이 불안이 많던 그 시기에 내게 큰 위안이 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었다.
발 밑에 있는 꽃들로부터 머리 위의 꽃들까지 관심이 확대된 것은 코로나 때였다. 2020년에 일은 모두 재택으로 하게 되고 사회적 거리 두기로 밖으로 나갈 일도 별로 없어지니 걷기에 대한 필요성이 더 커졌었다. 운 좋게 숲세권에서 사는 나는 아파트 뒷산으로 자주 걸으러 갔다. 자주 가다 보니 나무에 핀 꽃들도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육십 대가 되니 시대가 많이 좋아져서 식물도감을 넘기며 꽃 이름 찾기에 품을 많이 들일 필요가 없어졌다. 핸드폰은 카메라 기능이 장착되어 있고 “모야모”라는 신박한 앱은 사진만 올리면 기계가 아닌 고수들이 직접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때 알게 된 꽃나무들은 팥배나무, 일본목련, 때죽나무, 층층나무, 쪽동백나무, 쥐똥나무, 국수나무, 노린재나무 등이었다.
바라보며 기분 좋으면 됐지 굳이 이름을 알아야 할까? 어떤 사람과 즐거운 활동을 같이 한다고 해보자. 그 사람과 함께 어울렸을 때 즐거웠으면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과 친구가 된다면 더 좋지 않을까? 꽃의 이름을 아는 것은 마치 그 꽃과 친구가 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님의 시 구절은 나의 이런 마음과 같은 맥락일까?
무엇인가를 좋아하면 그 좋아하는 마음이 욕심을 불러일으킨다. 꽃에 빠지게 되자 꽃들의 군락을 보고 싶어졌다. 어느 계절 어느 곳으로 가면 배부른 심정으로 꽃들을 볼 수 있을까? 욕심은 커져갔지만 현실은 뒤따라 주지 않았다. 아주 가끔 무리해서 꽃의 군락을 보러 서울을 벗어나기도 했고 꽃들의 시즌을 알기 위해 조바심 냈다. 실제로 꽃을 보러 가는 것과는 상관없이 내가 꽃에 대해서 많이 알아야 하고, 이왕이면 전성기의 꽃을 보고 싶다는 태도가 생겨났다. 꽃에 대한 정답을 맞히고자 하는 수험생의 태도 같았다.
그런 나를 발견하고 나의 욕심을 한 명의 여성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아리따운 여성을 계속 취하고자 하는 여성 편력가의 욕심에 비유했다. 비록 무해한 꽃에 대한 탐닉이라고 할지라도 지나치게 되면 아름다워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여성 편력가의 욕심과 다를게 뭐냐고 스스로를 설득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설득은 한 번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여러 번 반복해서 설득해야 할 것이다. 올봄에도 일정상 무리해서 전성기의 여의도 벚꽃을 보러 갔다. 서울에 20년 이상 살면서 한 번도 못 가봤고 그리고 내가 아직도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육십대라는 것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집착이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벚꽃길이 아닌가? 내년에는 서울에 살지 않을 수 있으니 마지막 찬스를 누려야지 등등의 변명을 하더라도 그건 집착이었다. 오후에 강의가 있는 날 오전에 다녀왔으니 말이다.
집착에 의한 소유는 자연스러운 소유보다 덜 기쁘다. 이제 군락을 이룬 꽃이거나 소문난 풀꽃이거나 집착에 의한 꽃구경은 지양하도록 스스로를 설득할 것이다. 이번에 노각나무를 만난 것처럼 자연 속에서 떠돌다 꽃들을 만나 그 기쁨을 향유하면 될 것이다. 여의도 벚꽃처럼 억지 부리지 않고. 물론 상황에 맞춰 자연스럽게 꽃들을 찾아 떠나는 것은 배제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그 사랑이 지나쳐 또는 왜곡돼서 스스로 굴레를 쓰지 않도록 천천히 사랑할 일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지금과 여기를 중하게 여기라고 말한다. 꽃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꽃들과 잘 만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노각나무 꽃
(대문사진: 뒷산 층층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