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여자들은 약속을 폰에 저장하지 않는다. ‘적는다’.
도쿄에서 처음 친구를 사귀고,
처음으로 디저트 약속을 잡던 날이었다.
“그럼, 9월 14일, 오후 세 시 어때?”
달력 한참 넘긴 날짜였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여름인데, 벌써 가을의 약속이라니.
뭐지? 이 치밀한 계획력은.
나는 아이폰 캘린더를 열었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가방을 열었다.
아주 익숙한 손놀림으로 다이어리를 꺼내더니,
볼펜을 돌려 조용히 캘린더 페이지를 펼쳤다.
“…어라, 다이어리네?”
그건 잠깐의 놀라움이었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그녀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전철 좌석 위에도,
카페 구석 자리에도,
회사 회의실 테이블 위에도
도쿄의 여자들은 틈만 나면 조용히 가방 속에 손을 넣는다.
그리고는 무심한 얼굴로 다이어리를 꺼내 펼친다.
그녀들은 스스로를 ‘(手帳派) 수첩파’라고 불렀다.
하지만 내 눈엔 아무래도 ‘다이어리’였다.
수첩이라기엔 크기가 묘하게 크고,
가죽 커버에 리필 속지가 단정히 꽂혀 있고,
들어보면 ‘어, 제법 묵직한데?’ 싶은 무게가 손끝에 전해진다.
그건 누가 봐도, 그냥 평범한 수첩이 아니었다.
딱 봐도,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다이어리’였다.
그리고 그 다이어리는 단순히 스케줄을 기록하는 도구가 아니었다.
슬쩍 들여다본 페이지에는 회의 일정과 출장 날짜,
남자친구와의 저녁 약속이 나란히 적혀 있었고,
그 사이에는 위시리스트가 끼어 있었다.
올해 꼭 가야 할 레스토랑,
아직 티켓조차 열리지 않은 전시회,
언젠가 꼭 손에 넣고 말겠다는 가방 브랜드 이름까지.
그리고 구석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정리된 가계부가 숨어 있었다.
점심 도시락 값, 매달 빠져나가는 교통비,
“이번 달은 아껴야지”라는 다짐이 곁들여진 흔적들.
그녀들의 다이어리는 ‘펜으로 쓰는 삶’ 그 자체였다.
나는 매일 참으로 다양한 다이어리들을 구경하며 산다
회의 중, 샤넬 캐비어 다이어리를 꺼내는 여자를 보면
나는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린다.
“이건 분명 내 월세보단 비싸겠지.”
에르메스 토고 가죽 다이어리를 들고 들어오는 디렉터를 보면
“나도 언젠가 성공하면 저건 꼭 하나쯤…”
하며 위시리스트 맨 위에 올려놓는다.
또 어떤 이는 손때가 고스란히 묻은 일본 전통 공방의 다이어리를,
누군가는 무인양품의 심플한 커버를 쓴다.
재질도, 색감도, 질감도 다 다르지만
그 안에 적힌 하루만큼은 놀랍도록 진지하다.
그럼에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누구도 다이어리를 꾸미지 않는다는것.
가방엔 인형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면서도,
다이어리만큼은 마치 ‘비밀금고’처럼 손대지 않는다.
스티커? 없다.
색연필? 없다.
마스킹 테이프? 더더욱 없다.
한국의 ‘다꾸’ 문화처럼 스티커와 마테로 난장이 벌어지는 풍경은
여기선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담백하게, 있는 그대로 적고 남긴다.
그 꾸밈없는 태도가, 오히려 아날로그가 오래 살아남는 힘일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일본이 ‘페이퍼리스(paperless)’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가는 와중에도
다이어리만큼은 끝까지 살아남았다.
마치 디지털 시대의 마지막 아날로그 방공호처럼.
“약속 잡을 때, 한국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꺼내고,
일본 사람들은 다이어리를 꺼내잖아.”
내가 이 말을 꺼내자,
도쿄에 사는 한국 친구들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맞아, 맞아!”
이건 단순히 도쿄 여자들의 습관이 아닐지도 모른다.
일본 전역에 은근하게 흐르는
무의식적 문화 코드다.
그리고 언젠가, 시간이 흘러
그 종이들이 켜켜이 쌓였을 때—
그녀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같다.
“이건 내 회고록이에요.
그날의 커피 맛, 회의의 피로감, 그때 짜증났던 상사의 말투까지.
모두 이 종이 안에 저장돼 있죠.”
그러니까, 이건 단순한 다이어리가 아니다.
USB도, 클라우드도 아닌,
종이에 남긴 백업 파일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