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브랜드, 다른 해석
도쿄에 살다 보면,
이 도시가 ‘새로운 것’보다 ‘오래 남는 것’을 더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도시라는 걸 알게 된다.
그들은 로고보다 실루엣, 유행보다 내구성을 본다.
한국에 있을 땐, ‘꼼데가르송’은 곧 ‘PLAY’였다.
빨간하트에 큰눈알이 콕 박힌 티셔츠, 가디건, 스니커즈.
일본에 오면 꼭 하나쯤은 구입하고 싶은 아이템.
오모테산도 본점 앞엔 지금도 줄이 길다.
그 빨간 하트 하나를 사기 위한 오픈런은
십 년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한국에 있는 동생도 말했다.
“언니, 한국올때 꼼데 티셔츠 하나만 사다줘”
“헐, 너도?”
그래, 그 빨간 하트는 귀엽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가장 단순하고, 가장 직관적으로 상징한 로고니까.
누구라도 한 번쯤 가슴에 붙여보고 싶어 한다.
그런데 도쿄에서는, 조금 달랐다.
귀여운 하트가 아무리 “나 좀 봐줘요” 하고 눈을 굴려도,
정작 도쿄 사람들은 시선을 잘 주지 않는다.
애교 과다인 하트보다, 그들은 꼼데가르송의 자켓과 바지를 집어 든다.
하트 대신 칠흑 같은 블랙.
웃음 대신, 침묵.
귀여움 대신, 담담한 무표정.
묘하게도, 그 차가움이 오히려 더 강렬하다.
그리고 묘하게도,
그 블랙 셋업을 입은 사람들의 눈빛엔
플레이 라인의 하트를 두 배로 뛰어넘는,
더 진득한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호칭은 이렇다.
“갸르송.”
우리는 흔히 줄여서 ‘꼼데’라고 부르지만,
그들은 마치 친근한 지인의 이름 부르듯
‘꼼데’와 ‘갸르송’을 따로따로 나눠 부른다.
성과 이름처럼.
정말로 내가 만난 도쿄 사람들은
플레이 라인을 입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없다.
하트는 너무 노골적인가?
너무 “나 사랑받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럴까?
예나 지금이나.
그 빨간 하트는 한국에서는
길거리에서 한번은 마주치는 단골손님 같은 존재였는데,
이 도시에서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내가 갸르송의 매력을 처음 체감한 건, 회사 선배 덕분이었다.
그날 그가 입고 나온 건, 어디서 본 적 없는 실루엣이었다.
자켓은 어깨선이 평범하지 않았고,
바지는 조용히 퍼졌다가 발목에서 절제되듯 모였다.
그건 분명, 일반적인 재단 방식이 아니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 물었다.
“선배, 그거 어디 브랜드예요?”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갸르송.
내가 제일 자주 입고, 제일 아끼는 옷이야.”
무려 10년째 입고 있다고 했다.
보통 옷이라면 이미 해지고, 지겨워졌을 시간이다.
하지만 갸르송은 달랐다.
저렇게 세련된옷이 10년전꺼라고?
그 옷을 입은 선배는 인간 ‘갸르송’ 같았다.
옷이 아니라 거의 조형물에 가까운 실루엣.
움직임마다 직선과 곡선이 묘하게 흔들리며 작은 전시회를 보는 듯했다.
나는 속으로만 장바구니에 ‘갸르송’을 담았다.
실제 장바구니였다면, 아마 파산 신고부터 했겠지.
또 재밌는건, 이들은 옷을 단숨에 사지 않는다.
월급에서 조금씩, 조용히 떼어 모은다.
입어보고, 내려놓고, 마음을 접었다가 또 펼친다.
며칠을 고민하고, 몇 주를 다시 상상한다.
어울리는 신발도 머릿속에 그려본다.
그리고 어느 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매장에 들어가
확신에 찬 손길로 카드를 꺼내며 말한다.
買います! (살게요!)
비장하면서도 묘하게 즐거운 순간.
점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이건 一生物(인생템)이니까요.
내 인생에 한 번쯤은, 반드시 있어야 할 물건.”
(이쯤 되면 반품은 예의가 아니다.)
일본사람에게 평생아이템은
샤넬 클래식백도 아니고,
막스마라의 캐시미어 코트도 아니다.
그들은 갸르송의 셋업을 ‘인생템’이라 부른다.
꼼데갸르송에서 본 장면은, 이세이미야케에서도 발견된다.
한때 한국 어머님들의 여행 필수템,
BAOBAO ISSEY MIYAKE.
(바오바오 이세미야케)
삼각 모듈이 반짝이며 접히는 구조,
빛을 받으면 각도마다 다르게 꺾이는 미래적인 외형.
그리고 ‘일본에서 샀다’는 상징성.
한국에서 바오바오는 여행의 기념품이자 럭셔리였다.
“도쿄 가면 바오바오 하나 사와야지.”
엄마들이 즐겨 하던 말.
지금도 바오바오의 매출은 한국과 중국이 책임질지 모른다.
일본 친구에게 물었다.
“바오바오 가방 어때?”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왠지… 퇴근하고 곧장 미술관 갈 것 같은 사람이 들 법한 가방?”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다.
“근데 왜 외국에서만 그렇게 인기 많을까?”
나도 모른다.
대신, 그들은 옷을 입는다.
이세이미야케의, 주름이 춤추는 옷.
한국에서 흔히 ‘어머님 전용 플리츠’라 불리던 그것을
도쿄에선 젊은 남녀들이 입는다.
출근길, 정장 위에 플리츠 스카프를 살짝 얹기도 하고
흰 운동화, 박시한 빈티지 티셔츠에, 재밌는 실루엣의 플리츠를 매치하기도하고
도쿄의 사람들은 그렇게 플리츠를 자기 방식대로 풀어냈다.
그들을 보며 깨달았다.
플리츠가 이렇게까지 자유로울 수 있다니.
그 순간, 이세이미야케는 더 이상 ‘엄마 옷’이 아니었다.
그 주름은 도쿄라는 도시 자체가 젊고,
기발하고, 조금은 장난스럽게 재해석한 리듬 같았다
그래서 매장에 들어섰다.
호기심 반, 의심 반.
그리고 플리츠 바지를 입는 순간 알았다.
몸에 착 감기는 그 가벼움.
거울 속 내가, 갑자기 한층 세련된 도시인이 된 듯한 착각.
솔직히 살 생각은 1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다리에서 옷을 벗어내려는데, 손이 자꾸 멈췄다.
한 번 입으니 벗기 싫은 거다.
그렇게 나는, 플리츠라는 ‘엄마옷’을
내 인생 첫 ‘도쿄옷’으로 데려오게 됐다.
내가 이 도시에 살며 알게 된 건,
스타일과 소비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였다.
한국인은 ‘PLAY’를 입고,
일본인은 ‘갸르송’을 입는다.
한국인은 바오바오백을 들고,
일본인은 플리츠를 입는다.
왜 그런지는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도시를 오래 바라보다 보면,
소비와 스타일의 차이를 알게된다.
그차이엔 문화의 결, 도시의 리듬,
그리고 사람들의 아주 사소한 습관이 스며 있다.
다시 말하자면
서울은 소비로 입문하고,
도쿄는 해석으로 완성된다.
서울이 ‘갖고 싶은 도시’라면,
도쿄는 ‘왜 샀는지 되묻게 되는 도시’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이 도시의 해석 앞에서
조금은 서툴게, 그러나 묘하게 즐겁게
머뭇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