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허세도쿄 14화

도쿄에서는 샤넬을 숙성시킵니다.

― 도쿄의 샤넬 숭배법

by Asparagus





한국에서 샤넬은
프로포즈 백이기도 하고,
시어머니가 예물로 안겨주는 사치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도쿄에서 “이 샤넬 백이 뭐예요?”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조금 다르다.


그리고 꽤 자주 듣는 대답.
“아, 이거? 우리 엄마한테 물려받은 거야.”

그 순간, 내 심장은 스르륵 무너진다.
스스로 카드를 긁어 산 것보다 백 배쯤 더 부러운 대답이니까.


샤넬을 물려받는다는 건 단순히 가방 하나를 얻는 게 아니다.
시간과 이야기, 그리고 ‘엄마의 지난 삶’까지 통째로 함께 받는 것이다.


나는 가끔 상상한다.
내 엄마가 남겨줄 만한 건… 아마 오래된 압력밥솥이나,
다이얼이 잘 안 돌아가는 드라이어 같은 것일 거다.

물론 그것도 역사와 이야기가 있긴 하다.

다만, 샤넬만큼 반짝이지는 않을 뿐이다.



그러니 누군가 무심히 말하는 그 한마디—

“엄마 거 물려받았어.”
이건 사실 패션계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세련된 자랑이자,

가장 잔인한 ‘부의 편차’ 보고서다.



어쨌든, 유전의 힘은 참 대단하다.
토끼는 토끼를 낳고, 호랑이는 호랑이를 낳고,
멋쟁이는 멋쟁이를 낳는다.

게다가 멋쟁이 엄마의 딸은,

대체로 더 멋쟁이다.



그녀들은 신상보다 오래된 것을 든다.

새로 나온 모델보다, 엄마 세대의 클래식 백을 조용히 꺼내 들고,

파리 여행 중 벼룩시장에서 건져온

오래된 트위드 재킷을 아무렇지 않게 걸친다.


시간이 지나도 샤넬은 낡지 않는다.

그렇다,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그래서 누군가 투자라며 샤넬을 살 때,

왠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래, 차라리 은행 예금보다 이자가 빠를지도.”



한국에서는 모두가
22백, 25백을 손에 넣으려고 안달이지만,
도쿄에서는 의외로 신상 샤넬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왜일까.

그들은 생각보다 ‘지금 막 나온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대신, 그녀들은 쇼케이스 구석에서

샤넬 진주 목걸이를 집어 올리거나,

샤넬 브로치를 하나 툭 꽂아 스타일에 조미료처럼 흩뿌린다.

그 선택에는 묘한 여유가 느껴진다.



일본에 오래 살며 깨달은 게 있다.

여기는 어릴 때부터 ‘물건을 아끼고 오래 쓰는 법’을

몸으로 배우는 사회다.


고등학교 때 쓰던 필통을 여전히 쓰는 사람도 있고,

몽블랑 볼펜을 10년째 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게 멋인지, 단순한 집착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새것을 휘발시키듯 소비하는 세상에서

그 느릿한 집착은 묘하게 세련되어 보인다.

마치 오래 신은 구두가 새 구두보다 더 깊은 윤기를 내듯.



물론, ‘빈티지’라고 다 존중받는것은 아니다.

도쿄 여자들의 심사는 매우 까다롭다.

가죽의 감촉, 체인의 무게, 금속의 광택,
그리고 아주 은은하게 풍기는 ‘시간의 맛’까지.

그 모든 항목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빈티지”라는 이름표를 달 수 있다.


하라주쿠의 Amore Vintage,
시부야의 Casanova Vintag,
코엔지의 빈티지 거리까지


도쿄를 찾는 여자들이라면

샤넬 빈티지 숍 하나쯤은 반드시 리스트에 올린다.

전 세계 패션 피플들이 ‘샤넬 순례’를 위해

이 도시로 몰려드는 것도 이상할 건 없다.


한국과 도쿄, 샤넬을 즐기는 방식은 같아도

접근법은 완전히 다르다.

한국은 “샤넬은 오늘이 제일 싸다”는 말이 지배하고,

도쿄는 “샤넬은 시간이 만든다”는 신념이 지배한다.



그래서 그녀들에게 샤넬은

패션의 ‘상징템’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숨 쉬는 ‘생활템’이다.

특별한 날만 꺼내는 기념품이 아니라,

매일 어깨에 걸리고, 손때가 배고,

자연스럽게 닳아가는 물건.



도쿄에서 물건은 버리는 게 아니다.
시간과 함께 살아가는 것, 기억을 담는 그릇이다.

그래서 빈티지 샤넬을 든 여자는
그저 멋진 게 아니라, 시간을 품은 사람같다.


조용하지만 확실한 스타일의 방식.

오래될수록 더 깊어지는 아름다움.


그게 빈티지 샤넬의 힘이다.

(적어도 샤넬은 집값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집은 어깨에 못 걸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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