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나이로 9살인 우리 첫째 아이는 중증 자폐를 가졌다.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가 고비다.
이러한 우리의 삶에 3살짜리 둘째 아이가 함께 하고 있다. 아이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둘째 아이에게 짐을 주는 것이 싫어서 둘째를 낳는 것에 대해 난 완강한 반대주의 자였었다. 하지만 아내가 정상 아이를 키워보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한 번이라도 느껴보고 싶다는 그 눈물 섞인 말이 내 마음을 변화시켰다.
한 번의 유산이 지나고 우리는 마침내 둘째 아이를 출산했다. 첫 애와 6살 차이였다. 보물과 같은 이 정상적이고 평범한 아이는 우리에게 많은 웃음을 주었다. 나보다 특히 아내에게 밝은 웃음을 주었다. 그리고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는 가끔씩 이렇게 말한다. 둘째 아이가 우리를 살렸다고. 이 아이가 없었으면 우리 가족은 아마 지금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둘째 아이가 없었으면 우리는 하루에 한 번도 웃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만족감, 어쩌면 이기심 사이에서 예전에 둘째 아이를 낳기 싫어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점차 무감각해져 갔다.
하지만 아이가 3살로 접어들면서 하나하나 파도가 밀려오듯이 아이는 우리 가족이 조금 특별하고, 특별한 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둘째 아이의 이러한 반응을 목격할 때 우리는 가슴이 찢어졌다. 이 아이는 무슨 잘못이 있던가. 우리의 이기심에 인해 평생 짊어야 할 고난을 받았나.
우리는 둘째 아이가 우리 가족이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 면서도 내색 않고 숨기려 했다는 것을 몇 번 목격하고야 말았다.
이제 겨우 3살인 아이가 내색 않고 스스로 견디려 했다는 사실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찢어놓았다.
한 번은 관광지의 레스토랑을 갔을 때였다. 그 식당의 원형 테이블이 여러 개 놓인 구조가 첫애에게 뭔가 큰 자극이 되었나 보다. 첫 애는 패밀리 레스토랑, 백인들로 가득 찬 곳에서 미쳐 날뛰었고, 우리는 간신히 이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3살짜리 둘째 아이는 이 상황이 너무 부끄러웠나 보다.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식당 밖으로 나갔다. 처음있는 일이었다.
우리의 삶과 정반대인 찬란한 호수와 분수 옆을 걸으면서 풍경을 즐기는 척했다. 나는 계속해서 다시 돌아가서 밥을 먹을까 물어봤다. 아이는 모든 식사가 끝날 때까지 끝내 형의 장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본 아내와 난 큰 충격에 빠졌다. 이 조그만 아이가 벌써부터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구나. 우리의 짐작이 수면 위로 드러난 명확한 사건이었다.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최근 비슷한 일이 또 생겼다. 미시간 호수, 오대호라 불리는 호수가 해변에 놀러 갔다. 그곳엔 물웅덩이들이 곳곳에 있었다. 마치 약속을 한 것처럼 한 웅덩이 당 한 가족이 차지해서 놀고 있었다. 호수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웅덩이에 고인 물은 햇볕을 머금고 따뜻해서 어린아이를 가진 가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첫 아이는 물 웅덩이가 너무 좋았나 보다. 깔깔거리며 다른 가족의 웅덩이에 뛰어들었다. 슈퍼맨처럼 웅덩이에 엎드려 뒹굴었다. 그곳에 있던 다소 뻣뻣했던 백인 가족은 이를 불편하고 어색하게 반응했다. 옆 웅덩이 아빠도 슥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기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경호원 자세를 취했다.
그때 아내와 나는 둘째 아이의 눈빛을 보고 말았다. 형이 문제 행동을 한다는 것을 보고 하고 있던 모래놀이를 뒤로 하고 똑같이 웅덩이에 뛰어들어 같이 노는 척을 해줬다. 그랬더니 훨씬 그림이 좋아 보였다. 조금 더 평범한 아이들의 짓궂은 물장난 같이 보였다.
이러한 3살짜리 아이의 마음의 상처, 속 깊은 모습, 그리고 고통을 삭히는 모습에 아내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나 역시 마음이 찢어졌다.
아이는 3살부터 너무 빠르게 철이 들고 있었다.
맞아. 이래서 몇 년 간 우리가 둘째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었지. 우린 우리의 이기심에 둘째를 낳고 무거운 삶과 상처를 벌써 아이에게 주었구나. 첫 애도, 둘째 애도. 아이들의 잘못은 없었다. 우리는 악마 같았다.
앞으로 아이가 커 가면서, 사춘기를 지나고, 성인이 되면서 많은 일들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차라리 아이가 아이처럼 형 싫어. 부끄러워. 외춰줬으면 했다. 감정을 숨기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이 더욱 아팠다.
3살짜리 아이는 벌써 가벼운 고통과 무거운 고통을구분해 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