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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푸른 밤

네가 준 선물

by 유영해

“가질까?”

“가지자.”

늦은 밤, 제주도의 한 호텔에서 가족계획이 한창이었다.

침대 헤드에 궁둥이를 붙이고, 다리를 위로 쭉 뻗었다. 발목을 교차시켰더니 통통한 종아리가 조금은 얇아 보였다. 평소에 물구나무서기를 자주 하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려나. 멍하니 생각에 빠지는데 남편이 뭐 하냐며 시원하게 웃었다.


“이렇게 하면 임신이 잘 된대.”

어디선가 주워들은 잡지식을 실천하며 옆자리를 팡팡 쳤다. 슬그머니 다가온 발걸음이 옆자리에 누웠다. 거꾸로 된 눈코입에 고단함은 없었다. 울긋불긋 일어났던 피부 또한 매끈해졌다.


‘이게 바로 휴식의 힘이구나.’


어느새 코를 고는 파트너의 모습에 인자한 미소가 번졌다. 바람이 실어 나른 소금 냄새에 이불을 끌어다 배를 덮었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곧, 엄마가 될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 설레발을 다독이며 잠이 들었다.


제주도 여행은 유쾌했다. 시원한 바닷바람과 푸릇푸릇한 오름,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과 습기 어린 공기. 여행은 지친 몸을 물오르게 했다.

입장권 패스로 들어가는 박물관은 정비가 필요한 곳이 많았다. 쓰러져가는 영화박물관에서 비를 피해 숨어든 고양이 가족을 만났다. 허탈했던 마음은 치즈 고양이의 애교 한방에 없어졌다. 기대했던 고기국수보다 얼큰한 해장국이 더 맛있었다. 쩍쩍 달라붙는 오메기떡에 반해, 친정과 시댁으로 택배를 보냈다. 호평 일색이었다.


한 달의 휴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남편은 느린 걸음으로 배를 향해 출발했다. 나 또한 부산항으로 재출근을 시작했다. 배가 부산항으로 들어오면 만날 수 있을 텐데. 영도대교처럼 우리 사이에 도개교가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거... 두 줄이야?”


실현 불가능한 소원 대신 뜻밖의 소식이 찾아왔다. 때마침 쉬는 날이었다. 늦어지는 생리에 퇴근길에 사 온 테스트기 상자를 열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걸려서 세면대 위에 두고 화장실을 나왔다. 아침을 먹고 양치하러 들어갔을 때야 내버려 둔 하얀색 막대기를 발견했다. 칫솔을 들고 치약을 묻히고 이를 닦으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양치 컵을 내려놓고서야 손을 뻗었다. 아니겠지. 설마 됐겠어. 하지만 결과는 선명한 두 줄이었다.


새 항로가 나타났다. 엄마가 됐다는 기쁨보다 남편한테 이 소식을 전할 생각에 얼굴이 폈다. 하선할 때까지 비밀로 했다가 부른 배로 나타나는 상상을 했다. 사색이 된 남편에게 드라마 속 대사를 던졌다.

“당신 아이예요.”


아찔한 생각에 입꼬리를 씰룩였다. 여러 가지 방법을 떠올려 봤지만 아쉽게도 현실성이 없었다. 상대는 바다 위를 둥둥 떠다녔다. 하루 120킬로미터를 이동하는 혹등고래가 아닌 이상 태평양을 건널 순 없었다. 결국, 아쉬움을 삼키고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이 유난히 길었다.


“화상통화 돼?”

“갑자기? 알았어.”

내 쪽에서 화상통화를 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도, 남편은 의심이 없었다. 후후, 순진한 녀석. 화면 가득 익숙한 얼굴이 보이는 순간, 오른손에 들고 있던 테스트기를 카메라 앞으로 내밀었다.

“나, 임신했어.”


화면이 잠시 멈춘 줄 알았다.

남편의 얼빠진 표정이 몇 번이고 눈을 끔뻑였다. 실실 입꼬리가 올라갔다. 떨리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전해졌다.


“진짜야?”

“진짜야.”

“진짜 진짜야?”

“진짜라고.”


남편은 몇 번이나 진짜냐고 물었다. 테스트기를 자세히 보려고 눈을 찡그리는 모습에 왠지 모를 뿌듯함이 몰려왔다. 믿기지 않는 눈초리에는 설렘과 감동이 섞여 있었다. 기분 좋은 너털웃음이 갑판에 울려 퍼졌다. 나도 따라 입을 ‘헤’하고 벌렸다.

“아빠가 된 걸 축하해.”


엄마가 되었다는 실감보다 남편이 아빠가 되었다는 감동이 먼저였다. 아기는 아직 손톱보다 작았다. 기뻐하는 남편 얼굴만 커다랗게 다가왔다.

휴가를 한 달이나 당겨 쓴 시점이라 빠른 하선은 기대할 수 없었다. 어차피 임신은 내 몫이라 상관없었다. 의논 끝에 출산 한 달 전에 배를 내리기로 했다. 아이의 예정일은 경칩이 지난 봄이었다. 개구리와 함께 눈을 뜨는 게 좋아서 태명은 봄으로 정했다. 열 달의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임신이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 면세점 근무도 끝이 났다. 배 속 아이는 챙겨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아는 것 같았다. 겨울철에 수박을 찾게 된다는 입덧도, 세상의 모든 냄새가 적이 된다는 입덧도 하지 않았다. 내 입덧은 입맛이 없는 거였다. 먹어도 이상은 없지만,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이어트 신이 찾아온 건가.’

뜻밖의 횡재였지만, 밥을 굶을 수는 없었다. 조금씩만 먹었더니 임신 중기에도 옷으로 몸을 가리면 아무도 임산부로 보지 않았다.


“여자애가 좋아, 남자애가 좋아?”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나는 여자애. 무조건 여자애.”

“흠. 그럼 나는 남자애. 내가 여자니까 남자가 궁금해.”


아이의 성별은 수수께끼였다. 남편은 여자아이를 강하게 원했다. 나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남자아이를 선택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왠지 남자아이일 것 같았다. 그런 강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성별을 알게 된 날,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고등학교 동창은 나와 같은 시기에 임신해서 똑같이 3월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친구 모임에서 함께 꺼낸 초음파 사진에 우리는 환호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냐며 신기해했다.

“아이 성별 나왔어? 나는 여자애래!”

“오, 축하해! 나는 남자애래!”

“아... 괜찮아, 괜찮아.”

“... 뭐가 괜찮아? 난 남자애라서 좋은데.”


여기저기서 딸바보 아빠라는 신인류가 탄생하고 있었다. 아들을 밴 나는 졸지에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친정은 기뻐하고 시댁은 슬퍼했다. 딸 둘을 둔 엄마와 아들 둘을 둔 시어머니의 입장 차였다. 알고는 있지만, 속상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건 다름 아닌 남편이었다.


“아니, 딸이었으면 좋았겠다고, 내 희망을 말하는 것도 잘못된 거야?”

“어. 잘못된 거야. 이미 성별은 나왔고, 돌이킬 수 없는데 왜 그런 소리를 해?”

계획한대로 예정일 한 달 전에 남편은 하선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곧 태어날 아이가 화두에 올랐다. 술이 오른 남편은 깨진 희망을 털어놓았다. 순간, 꾹꾹 눌러놨던 서러움의 봉인이 풀렸다. 지난 9개월 동안, 챙겨주는 맛있는 음식은 바라지도 않았다. 혼자 가는 정기검진도 씩씩하게 다녀왔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뻔뻔한 남편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화는 풀리지 않았다. 곯아떨어진 남편을 던져두고 나갈 채비를 했다. 다대포 백사장은 고요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발밑까지 따라왔다. 환하게 뜬 달님과 빛나는 윤슬에도 맘은 불타올랐다. 씩씩대며 해안선을 따라 걸었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별똥별이 긴 꼬리를 그리며 떨어졌다. 사라진 빛은 일순 강렬했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벅찬 전율에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제 보니 밤하늘에는 별빛이 가득했다. 화가 났을 때는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혹시 네가 보여준 거야?”


불룩한 배를 어루만지며 그렇게 속삭였다.

분노는 빛 속으로 녹아들었다. 남편은 내일이면 숙취에 머리를 감싸고 어제 있던 일을 복기할 것이다. 옆에 앉아 툴툴거리며 불만을 토로해야지. 네가 없던 시간은 힘들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보고는 싶었다고. 아이의 성별은 하늘이 정해주는 운명이니, 더 이상 토 달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술 먹으면 곰이 되는 남편은 다음날이면 인간으로 돌아온다. 아무래도 해장국의 도움이 절실했다. 나는 휴대전화로 맛집을 검색했다. 마늘을 듬뿍 넣은 돼지국밥집을 찾아가야겠다. 백사장에 찍어 놓은 발자국은 어느새 지워지고 없었다.

잘했어요.

마치 나를 다독이듯, 아이가 안쪽에서 톡,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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