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특별한 이유는 그녀는 꿈을 꾸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그는 햇살에 살짝 바랜 듯한 무명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셔츠는 갈색 버튼으로 단정히 여며져 있었고 손끝으로 만지면 뻣뻣한 촉감이 전해질 것 같았다. 짧은 머리카락에 손가락이 스치듯 지나간 자국을 남기며 대충 왁스를 발라 스타일을 잡았다. 검정테의 안경은 그의 차가운 인상을 더 차갑게 보이게 했다. 그는 이 자유로운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격식 있는 태도와 도회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줄곧 무표정하더니 또 누군가와 말을 할 때면 환한 미소로 말을 나누고 말 끝에는 항상 이 말을 덧붙였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는 언젠가는 다시 그녀를 만나리라 생각을 했다. 저녁장을 볼 때에도, 길가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미소 지은 그날에도, 카페에서 커피 한 잔과 함께 날씨를 흠뻑 즐기던 그날에도 생각했다. 그는 모든 순간 그녀를 다시 만나리라 생각했다. 매일 누구를 만나도 어떤 대화를 나누어도 모든 일 끝에는 그녀가 머물고 있었다.
그는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가 특별한 이유는 그녀는 꿈을 꾸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높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 으레 그러하듯 그녀도 쉼 없이 추락했어요. 하지만 그녀는 금방의 추락은 이내 잊어버리고 또 올라가는 꿈을 꿔요. 그리고 또 추락하고 또 꿈꾸고 또 꺾이고 그래도 또 꿈을 꾸는 사람이에요. 혹자는 그녀를 몽상가라 칭하더군요.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를 방랑자라 했어요. 그녀가 전에 만나던 사람은 그녀를 이방인이라고 했대요. 그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하는 말은 결코 긍정의 의미가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녀는 바보가 아니에요. 저는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항상 생각하는 사람이고 항상 옳은 길을 찾을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이에요. 사실 그녀가 추락했음을 잊어버리는 까닭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저는 알았어요. 그런 그녀를 보고 싶어요. 제 마음은 단순히 헤어진 연인을 그리는 마음이 아니에요. 삶의 모든 순간에서 꿈꾸는 그녀가 결국 무슨 일을 해낼지 너무나도 궁금해요. 그 일을 해낼 때까지 꺾일 때마다 제가 그녀를 지켜주는 무언가이고 싶어요"
그는 바보다. 사실 그녀는 하나도 특별하지 않을 테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그의 눈에만 특별해 보이는 걸 테다. 하지만 나는 모든 말을 뒤로하고 그저 미소로 그의 말에 동조했다.
둘은 다섯 해 전에 처음 만나서 사랑에 빠졌다. 벚꽃나무의 꽃이 분홍빛과 연둣빛으로 물드는 계절이었다. 하루 종일 은은한 바람이 멎지 않는 계절이었다. 가끔 날리는 꽃잎이 코끝을 스치면 그 계절의 냄새가 은근히 따라왔다. 햇볕은 뜨거웠지만 바람은 아직 차가운 계절이었다. 그가 운영하는 카페에 그녀가 찾아왔다. 흰색 바바리코트를 입고는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커피를 주문하고 창가 자리에 앉아서 코트를 벗어 옆 의자에 걸어 두었다. 천 가방에서 노트북과 세 권의 노트와 필통을 꺼냈다. 노트에 초록색 연필로 무언가를 썼다. 그러더니 노트 두 권을 번갈아보면서 노트북에 무언가를 타닥타닥 입력하고 있었다. 눈이 부셔 한 껏 찡그렸지만 그것이 창가에 쬐는 햇볕 탓임을 몰랐다. 그 옆에는 블라인드가 있음을 알지 못했다. 혹은 그 햇살이 마치 좋은 동료인 것처럼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손끝은 망설임 없이 움직였고 눈동자는 매 순간 어떤 생각의 숲을 헤매는 듯했다. 그는 그녀의 눈빛이 빛나는 것을 보아하니 좋아하는 일을 갓 찾은 사람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런 사람들이 가진 고요한 불꽃이 그녀에게도 있었다. 그는 좋아하는 일을 업 삼아 하는 이들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는 주위 모두가 해야 한다는 전형대로 살았다. 그렇게 살아야 함에 의문도 품지 않았다. 학창 시절 공부하라고 해서 공부를 했고 대학에 가야 한다고 해서 대학에 갔고 취업을 해야 된다고 하여 취업을 했다. 그렇게 살았다. 그는 공학을 전공하고 한국의 모대기업 연구팀에 취업을 했다. 그렇게 삼 년을 다녔다. 여덟 시까지 출근하기 위해 여섯 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집에 오면 보통 여덟 시였다. 그는 그 회사를 다니는 삼 년 간 일 년에 다섯 번을 제외하고는 빠짐없이 운동했다. 주말에는 친구들을 만나서 클라이밍을 타거나 스쿼시 치는 것을 즐겼다. 저녁에는 분위기 좋은 바에 가서 술 한 잔 하는 재미를 알았다. 여름휴가 때는 일주일간 서핑을 타러 갔고 겨울 휴가 때는 일주일정도 보드를 타러 갔다. 그는 그게 나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그의 꿈은 이게 전부였다. 이렇게 살다가 그의 부모처럼 결혼해서 그들처럼 단란한 가정을 이루겠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이 사는 그 삶이 나빠 보이지 않았고 모두가 살고 있는 그곳에 정답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다음 날 그녀가 또 찾아왔다. 이번에는 빨간색 카디건을 입고는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다음날은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는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켰다. 그렇게 주중 내내 오더니 그 주 토요일에는 오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기다렸다. 일요일에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 그녀가 왔다. 그 주 평일 내내 빠짐없이 왔다. 그 주 주말에는 또다시 오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궁금했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지금 앉아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금 만나는 이가 있는지 궁금했다.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 주 간 관찰 끝에 그는 그녀와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월요일 아침 그는 가장 좋아하는 향수를 뿌리고 짧은 머리를 깔끔히 왁스로 정돈했다. 대학시절 만났던 여자친구가 잘 어울리는 색이라고 해주었던 색과 비슷한 무명색 셔츠를 꺼내 입었다. 열 시에 출근하여 그녀를 기다라며 준비했다. 지난날 한 시쯤 빠짐없이 왔던 그녀였다. 한 시가 지나자 그는 매분 시계를 확인했다. 1시 23분은 두 번이나 보게 되었다. 1시 31분을 확인하자마자 그녀가 왔다. 그녀는 어김없이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그가 연습한 대로 자연스럽게 무슨 일을 하시냐고 물어보면 됐을 일이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햇살도 바람도 딱 좋네요. 지난주부터 자주 오셨던 것 같은데 카페 분위기가 괜찮나요?"
"분위기도 좋고 커피도 맛있어서 자주 오게 되네요. 집도 여기 근처 거든요, 여기 사장님이에요?"
"네 작년에 퇴사하고 차렸습니다. 원래 제가 참 재미없는 사람인데 살다가 처음 해보는 일탈이었어요.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이영준입니다"
"저는 이하나예요. 퇴사요? 저는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데 저랑은 맞지 않을 것 같아서 회사는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원래 어떤 직업을 가지셨어요?"
"그냥 엔지니어였어요. 별로 재미있는 직업은 아니었죠. 확실한 것은 제가 원하는 삶은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걸 왜 서른 다 돼서 깨달았나 몰라요. 하나 씨는 무슨 일을 하시나요?"
"저랑은 전혀 다른 분야라 멋있어 보이는걸요? 저는 일단은 표지 디자이너예요. 저는 졸업한 지 얼마 안 돼서 일단은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고 저랑 맞는지 확인하는 시기예요. 많은 일에 금방 권태를 느끼는 타입이거든요. 전에는 만화가를 하고 싶었는데 쓸 이야기가 많이 안 나와서 세 달 정도 연재하다가 그만뒀거든요. 그럼 영준 씨가 원하는 삶이라는 건 뭐예요?"
"사실 아직 찾지 못했어요. 확실한 것은 진짜 나를 찾고 싶다는 거예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철학과 인문학을 관통하는 주제는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것을 글로만 배웠지 피부로 느끼지 못했어요. 지금은 내가 뭘 좋아하며 뭘 원하는지 찾는 과정이에요. 근데 회사에 다니면 그렇게 생각할 틈도 없이 그저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더라고요. 일하는 것이 힘들진 않았는데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참 힘들더라고요. 제 자아보다 회사 속의 제 자아가 더 큰 것 같아서 그만뒀어요. 하나 씨는 이상이 있나요?"
"전 자유로웠으면 좋겠어요. 자유로운 직업을 갖고 싶다는 것이 아니에요. 저는 제 기억이 미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 순간 진짜로 살고 있는 건가 의심하거든요. 왜냐면 제가 원하는 이상과 순간이 같은 적이 없었어요. 저의 이상은 명확하지만 거기에 다다른 적이 없는 거죠. 그래서 항상 언젠가를 꿈꾸며 이 순간 자체로 행복하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제가 절대 비관적인 사람인건 아니에요. 오히려 제 주변 사람들은 저를 밝은 사람이라 말하거든요. 제가 원하는 이상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의 자유, 지독한 관계에서의 자유예요. 저 혼자만의 선택으로 갖는 자유는 잘 즐기고 있어요. 지금도 하고 싶은 것들은 다 해보고 꽤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주변 이들도 모두 저를 그렇게 보고 있다고 확신해요. 근데 있잖아요. 보통의 사람이 갖는 가장 큰 이상은 현재 본인과 가장 먼 특성인 거 아시죠? 진짜 자신을 찾고 싶은 영준 씨는 그렇듯 진짜 자신을 찾지 못하셨잖아요. 또 편견 있는 삶을 경계한다는 이는 가장 편견 있는 사람이고, 행복하고 싶다는 이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죠. 그렇게 보면 저는 지금 자유롭지 않은 사람일 텐데 역시 진정한 자유는 아직 찾지 못했나 봐요”
"그 자유를 찾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나요?”
“항상 생각하는 거는 있죠, 언젠가는 그렇게 할 거예요. 그게 무엇인지는 비밀이에요”
그날 저녁 둘은 같이 저녁을 약속했다. 그는 아르바이트생한테 카페를 맡기고 일찍 퇴근했다. 그녀는 집에서 화장을 고치고는 다시 나왔다. 약속한 장소 1층에 도착하여 둘은 같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갔다. 2층에서 3층을 향하고 있을 때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마침 그 에스컬레이터 위에는 그와 그녀만이 있었다. 그녀는 떨어지는 계단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울었다.
그녀는 그 순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이를 느꼈다고 했다. 이 에스컬레이터가 순간 미개해 보였다.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이렇게 가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그리고는 과거의 미개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았다.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뇌를 잘랐던 유럽의 의사들, 평생 궁전에서 일했던 조선의 궁녀들, 돼지를 산채로 잡아 도축하던 사람들, 전쟁에 나가서 죽어버린 많은 젊은 군인들 등을 말이다. 그녀가 이전에는 역사 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던 이들을 생생히 느꼈다. 그리고 이 역사를 과거로만 생각했던 자신을 생각하다가 그들도 모두 자신처럼 살아있었다는 사실이 뚜렷해졌다. 그리고 미래에 우리의 후손들도 명확히 보였다. 그 후손들도 그녀처럼 지난 역사 속 인물들로 자신을 느끼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이 많은 이들 중 자유를 꿈꾸는 그녀가 사실 아무것도 아님이 명확히 느껴졌다고 한다. 그게 너무 싫었다고 한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진실을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 순간 그는 그녀를 평생 사랑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순간 그는 그의 십 년 뒤, 그의 아들의 아버지가 되어, 그 아들의 아들의 할아버지가 될 모습이 선명해졌다. 그리고 죽기 직전의 순간이 보였다.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그녀를 그리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