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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폐 Sep 04. 2023

양배추와 무밭 한가운데서

산골이야기

양배추와 무밭 한가운데서


지난해 이맘 무렵 집 둘레에서는 양배추 작업이 한창이었다.

우리 집보다 더 큰 트럭에 차곡차곡 쌓인 양배추들은 도심으로 실려 가고, 밑동 또는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것들만 밭에 남았다.

양배추 작업이 끝나면 눈치 빠르고 발 빠른 이들이 (제초제를 치기 전) 용케도 알고 칼과 자루를 들고 와 남겨진 양배추들을 잘라가곤 하는데, 거의는 작업한 다음날이면 제초제를 뿌리기에 양배추를 가져가려고 온 이들을 보면 말리곤 했다.


제초제 비를 맞은 양배추들은 이삼일만 지나면 낙엽처럼 누렇게 말라 버린다.

밭임자는 남은 양배추들이 누렇게 다 말라죽었다 싶으면 밭을 갈아엎는다.

밭을 갈아엎기 전까진 양배추 썩는 냄새가 요맘 철이면 찾아오는 태풍 비의 비릿한 냄새에 뒤섞여 마을 이 구석 저 구석을 기웃거렸다.

윗마을 아랫마을 넓은 밭들 거의가 양배추밭이었고 어쩌다 무밭이었는데, 무슨 밭이 됐건 '나 살다 떠났다네!'를 찐하게 알리곤 한다.




올해는 집 앞뒤 몇 천평 밭 임자는 밭떼기로 사가는 이가 무를 심으랬다며 무를 심었고, 옆 언덕배기 몇 천평 밭 임자는 양배추를 심었다. 우리 집 앞뒤 밭주인과 옆 밭주인은 면 안에서 농사 많이 짓고 돈 많이 벌기로 쌍벽을 이루는 이들이다.

어쨌든, 앞뒤 밭의 무는 씨를 뿌린 지 며칠 만에 싹이 올라왔고 또 며칠 뒤에는 튼실한 것만 남기고 모두 뽑아버리는 순 솎음 작업을 했다.

어린 무순, 상품이 되게끔 잘 자라려면 한울(날씨)이 도와주어야 한다. 하지만 올해는 비가 았다. 그것도 열대우림 비처럼 밤새도록 쏟아붓듯 오다가 낮에는 쨍쨍 내리쬐는 뜨거운 날이 이어졌다.

저 위 사과농원의 사과들이 발그레 잘 익어가는 게 아니라 뻘겋게 데일(화상) 정도로.

가끔은 낮에도 폭탄비에 폭염으로 변덕을 떨었다.




비가 잠시라도 그쳤다 싶으면 무 주인은 베트남에서 돈 벌러 온 젊은 일꾼들을 데리고 와서 살충제(살균제인지)를 뿌리곤 했다.

무들은 조금 시답잖아 보이긴 했어도 파는 데는 지장 없을 만큼 커가고 있었지만 드문드문 고랑의 물 빠짐이 제대로 안 된 곳의 것들은 썩어가는지 무 썩는 냄새가 후덥지근한 바람에 묻어 열린 창으로 들어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이깟 냄새쯤이야 공기 좋은 곳에 사는 대가라고 생각하지 뭐, 기껏해야 보름에서 한 달인데 뭘!'


눙치곤 해왔다. 헌데 올해는 좀 다를 듯싶다. 무가 굵어졌고, 냄새가 좀 난다 싶을 때마다 약을 치더니 어느 날 어두컴컴해지는 저녁 무렵 이마에 불을 켠 일꾼들과 트럭들이 들어왔다.

밭으로 들어간 이들은 곧바로 두서넛이 한 조가 되어 내 팔뚝만 한 무를 쑥-쑥- 뽑아 이랑에 나래비로 가지런히 늘어놓았고, 식칼을 든 사람은 무순이 싹둑 잘리도록 칼로 내리치면서 따라갔다.

무밭에는 상향등을 켠 작은 트럭들이 여기저기로 오갔다.

순이 잘린 무들을 노란 플라스틱 상자에 담아 작은 트럭에 실어 주면, 작은 트럭은 밭가 도로에 서있는 5t 큰 트럭으로 갔고 그곳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무가 가득 담긴 노란 상자를 트럭 위로 올렸다.

큰 트럭에 올려지는 노란상자들은 일꾼들이 힘쓰는 소리를 대신 내주기라도 하는 듯 텅- 텅- 거렸다.


이슬이 내려앉는 늦은 밤이지만 아랑곳 않고 뽑고 자르고 담고 옮기고 실리는 소리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베트남 말과 뒤섞이며 새벽까지 이어졌다.

머리맡이 시끄럽지만 며칠 뒤면 냄새도 사라질 걸 알기에 자장가 삼으며 잠을 청했다.




아침, 밤새도록 작업한 무보다 남은 무가 더 많아 보였지만 며칠이면 끝날 걸 아니까 많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그런데..., 다음 날 또 다음날이 돼도 남은 무를 뽑으러 오질 않았다. 벌써 열흘이 넘었다.

남은 것들은 잎이고 무우고 검버섯처럼 검은 점이 생기면서 삐들삐들 말라가고 있다.


'작업이 끝난 건가? 왜 마저 안 하는 거지?'

궁금했지만 무밭 임자도 밭떼기로 산 이도 오질 않기에 물어볼 곳이 없다. 남은 건 버려지는가 보다 짐작만 할 뿐이었다.


며칠 전 농사와 유통에 대해 잘 아는 이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이로부터 다른 짐작을 할 이야기를 들었다.

5t 트럭에 실려간 상품(어떤 채소든)에서 농약 잔류량이 기준치를 넘으면 마저 하려고 했던 작업이 중단된다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아직 많이 남아있는, 멀쩡(해 보이는)한 무까지 통째로 버려진 것이다.


무의 한 삶이 밭에서 끝나가고 있다.

밭 한가운데 있는 우리 집 창문으로 안개가 짙게 깔린 새벽이면 무 주검(?) 냄새가 더 진하게 파고든다.

덕분에 살아있음을 깊이 느끼는 날들이다.



봉평의 남안동 다리 건너 밭에 효석문화제를 위해 심은 메밀이 흐드러지게 꽃을 피워내고, 아침저녁으로 가을 기운이 제법 느껴진다 싶은 날, 밭임자는 시들어 누래진 무는 물론 아직은 괜찮아 보이는 멀쩡한 무들까지 예초기로 툭툭 잘라버렸다. 무밭으로는 쓸모가 아주 끝났나 보다.

둔덕의 양배추밭은 푸르다 못해 시퍼렇다. 아직 상품으로는 가치가 없는가 보다.


땅은 모든 생명을 품어주고받아준다지만 팔기 위해 채소가 심기는 땅은, 본디 성품까지도 밭주인과 밭떼기로 사고파는 이들에 따라 뒤웅박 신세가 된다.

땅은 그저 채소의 뿌리를 감싸고 있을 뿐 흙이 가진 영양분은 내 줄 엄두도 못 낸다.  

날짜에 따라 크기에 따라 알갱이 비료도 모자라 물에 탄 영양제를 뿌리고 벌레 낄까 봐 살충제 뿌리고 병들까 봐 살균제를 뿌려대니 땅으로서 할 일은 할 틈이 없어 보인다.


그렇게 큰 농작물 특히 양배추 무 감자와 같은 채소는 냉장고에 넣지 않으면 금방 썩어 문드러지고 만다.

지렁이와 굼벵이 땅강아지가 돌아다니는 밭, 말하자면 지렁이가 땅을 뒤엎고 다니는 밭에서 자란 채소들은 냉장고에 넣지 않았는데도 1년이 다되도록 그저 조금 마를 뿐 아주 멀쩡한 것과 견주면 건강한 먹거리는 아니라고 본다.


오늘도 어김없이 안개에 스며 들어오는 무 썩는 냄새에 주절거려 보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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