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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사람 Jul 05. 2024

네 번째 집: 분당의 작은 전셋집 (2)

새치와 함께 얻은 교훈

언제나 그랬듯 우리는 작고 불편한 이 집에도 금방 적응을 했다. 조금 지나고 보니 장점도 많은 집이었다.


사계절을 온몸으로 느끼며 걸었던 등원길

첫 번째 장점은 자연환경이었다. 아파트 단지 옆으로 흐르는 탄천 길을 따라 풀과 꽃, 곤충은 물론 여러 새들까지 보면서 아침을 시작하는 것이 참 좋았다. 차를 태우면 5분 만에 편하게 데려다줄 수 있었지만 30분이 걸리더라도 숭이와 여기저기 참견하며 걷는 시간이 좋아서 거의 늘 걸어서 등원을 했다. (등원 후 혼자 돌아오는 길은 더더욱 예뻐 보였던 건 비밀!)


두 번째 장점은 우탄이의 직주근접이었다. 도어 투 도어로 걸어서 10분 거리로 출퇴근하는 경험은 그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을 행운이었다. 출근 30분 전에 일어나도 여유롭게 나갈 수 있고 회식이 아무리 길어져도 집에 어떻게 들어갈지에 대한 걱정이 없었으니 말이다. 한 가지 부작용은 회식 후 집에 돌아오는 길이 너무 짧아서 밖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꼭 집에 돌아와 피자를 만들어 놓는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은 나에게도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었다. 실제로 숭이가 급성 기관지염으로 입원했을 때에도 퇴근하고 바로 병원으로 올 수 있었다. 다행히 그보다 위급한 일은 없었지만 필요하면 업무 중에도 금방 달려올 수 있는 거리에 우탄이가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세 번째 장점은 주변 사람들이었다. 일찍 아이를 낳은 탓에 주변에 같이 육아하는 친구들이 없었던 나에게 숭이의 친구 엄마들은 좋은 육아 동지가 되어 주었다. 어린이집이 끝나면 다 같이 아파트 놀이터에 가서 1~2시간 뛰어놀고, 가끔은 한 집에 모여서 저녁까지 먹고 헤어졌다. 혼자 아이를 볼 때는 뭘 해도 시간이 안 갔는데 신기하게도 공동육아를 하면 시간이 금방 갔다. 어른들은 여러 꿀팁을 공유하고 수다를 떨며 스트레스를 풀고,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모여 맘껏 뛰어노는 즐거운 육아가 가능하다는 걸 분당에 이사 와서 처음 알았다.




이런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2년 계약기간이 끝나면 서울로 이사하자는 결심을 했다. 우탄이가 서울로 발령이 나려면 주소를 옮기는 게 유리하기도 했고, 나 역시 친정과 친구들이 있는 서울로 늘 가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우탄이가 임대인에게 전화로 전출 사실을 알렸다고 해서 나는 이사할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친정 근처에 적당한 집을 발견해 그 자리에서 분당 집의 계약 만료일로 이사 날짜를 잡고 전세 계약을 했다. 한 번 해봤다고 모든 과정이 2년 전보다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우탄이가 어느 날 불안한 얼굴로 "혹시 집주인이 보증금을 안 주면 어떡하지?"라고 물었다. 그러면서 임대인에게 계약이 만료되면 전출을 가겠다고 말하던 날의 통화 녹음을 들려주었는데, 그 안에는 다른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면 보증금을 내주기 어려우니 기다려달라는 임대인의 말이 담겨있었다. 27살의 사회 초년생 우탄이는 만료일 이전에는 세입자가 구해질 거라는 생각 반, 만약 못 구하더라도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반으로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이 없고 이사 날은 다가오니 더 이상 불안을 혼자 감당할 수 없어 털어놓게 것이다.


이사를 몇 주 앞두고 우리는 '전세 계약 만료 통보 내용증명', '임대차 보증금 반환 청구', '전세 보증금 반환 소송' 등을 계속해서 검색하고 있었다. 그리고 계약이 만료되면 임대인은 임차인에게 보증금을 반환할 의무가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임대인이 그날 돈을 돌려주지 않으면 우리가 훨씬 더 곤란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사갈 집의 보증금을 알아서 (대출 없이 현금으로) 마련해 지불하든가, 10%의 계약금과 함께 그 집을 포기하든가 둘 중 하나였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니 괜찮을 거라며 자신만만했던 우탄이도 이 사실을 알고 걱정에 잠을 못 이루기 시작했다. 덕분에 우리는 며칠 사이에 새치가 돋아나는 경험을 했고, 오히려 임대인에게 전화를 걸어 보증금을 마련해 달라고 애원하는 상황이 되었다. 세입자를 구하기 전에는 절대 보증금을 못 줄 것처럼 말하던 임대인은 여기저기 손을 벌렸다며 다행히 이삿날 보증금을 돌려주었다. 껌을 짝짝 씹으며 집을 둘러보면서 "다시는 일처리 그렇게 하지 마라."는 말과 함께.


사실 우리는 계약상 전혀 문제가 없는 결정을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상대의 사정을 조금 기다려줬다면 서로 마음고생을 덜 하고 마무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상대가 계약을 어길 경우 응징하는 것이 아니라, 원만하게 새 집으로 이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 봤을 때 그래도 당연히 돌려줘야 할 돈을 주면서 저렇게까지 고자세로 가르치듯이 말을 했어야 했나, 세입자가 구해질 때까지 우리가 기다렸어야 했나 하는 의문은 남는다. 하지만 비슷한 상황을 겪는 친구들에게 나는 꼭 먼저 세입자를 구하거나 보증금 반환에 대한 확답을 받고 이사할 집을 알아보라고 조언해주고 있다.


우리의 정신적 건강과 머리카락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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