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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앨범 Jan 17. 2024

아들, 게임하면서 화 좀 그만 내

결국 어떤 상황에서건 자신은 항상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전제에서 나온 생각이다.
- 초역 니체의 말 -


이른 아침, 아들은 게임에 열중하고 있다. 그런데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게임 화면을 들여다보니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게임이 풀리지 않는 것 같았다. 게임을 하다 보면 마음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지 뭘 그러냐며 핀잔을 주었다. 그런데 아들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어딘가 모르게 내 모습과 닮아있다.




게임을 하다가 자꾸 죽을 때, 일이 원하는 방향으로 풀리지 않을 때, 운전을 하다가 짜증이 날 때... 이런 상황들에 놓였을 때 나 또한 불쾌했다. 때때로 심한 불쾌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대체 이런 불쾌감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책 <초역 니체의 말>에서 답을 찾아봤다. 저자에 따르면 쾌감 또는 불쾌감이라는 감정은 자신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라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한다. 선택의 결과가 좋으면 쾌감을 느끼고 그렇지 않다면 불쾌감을 느낀다. 만약 자신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는 생각조차 없다면 벌어진 일에 대한 쾌감과 불쾌감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는 생각이 쾌감, 불쾌감을 이끌어 내는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일까? 내면, 행동,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자신이 통제권을 갖고 있다는 믿음(위키백과, 통제감) 때문이 아닐까. 통제에 성공했다고 생각하면 쾌감을, 실패했다고 생각하면 불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결국 ”선택의 자유 = 통제 가능“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아들이 게임하는 모습을 보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렇지만 평소 궁금한 내 모습이기도 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어느 정도 답을 찾은 것 같다. 일어난 사건 자체가 감정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통제에 성공했다는, 또는 실패했다는 생각이 쾌-불쾌를 유발한다. 그리고 지나친 통제감, 더 나아가 오만함이 이런 감정들을 더욱 심하게 요동치게 만든다.


이런 평범한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마음속에 명징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이제부턴 새롭게 깨달은 사실들은 삶 속에서 자주 상기시키며 지내볼 것이다.


아들, 게임하다가 짜증 날 때 많지? 뜻대로 되지 않아서 그래. 네 마음대로 게임이 풀려야 한다는 욕심을 조금 줄여봐. 아니면 네 뜻대로 될 수 있게 노력해 봐.

아들에게 적용해 본 결과는...??


“아들, 게임하다가 짜증 날 때 있지?”

“응”

“왜 짜증 나는 거 같아?”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그렇지!) 게임하다 보면 내가 원하는 대로... “

“그게 아니고 분명 버튼을 눌렀는데 작동을 안 해서”

“그러니까 그게 마음대로 되지...”

“버튼만 제대로 눌리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아, 그렇구나(ㅠㅠ)”


버튼을 통제할 수 없었던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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