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년을 살았던 곳에서 살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다. 바위굴을 파고 숨었다. 하지만 숨는다고 박해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죽어갔다.
무어인(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에 살았던 이슬람계 사람)은 7백 년 동안 이곳을 차지하고 살다가 기독교 왕조에 정복당해 쫓겨났다. 왕족은 북아프리카로 갔지만,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을 떠나서 갈 곳이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은 산에 바위굴을 파고 들어가 숨어 살았다. 그래서 동화마을처럼 보이는 프리힐리아나 언덕의 골목에는 침략과 전쟁의 슬픈 이야기가 담겨있다. 프리힐리아는 해발 318m 산맥에 있는 인구 3천여 명의 작은 마을이다. 가 본 적은 없지만 광고 속에서 본 그리스의 산토리니를 연상케 하는 하얀 집들로 이루어져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언덕에는 낙서 하나 없는 하얀 벽과 바다처럼 파란 문에는 문패처럼 개성이 담긴 타일이 걸려 있었다. 창문에는 벌레가 싫어하는 제라늄꽃이 붉게 피었다. 하얀색의 비슷한 집들은 그나마 화분으로, 타일로 각기 다른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골목을 걷다 보면 드문드문 벽에 타일로 정복자가 원주민을 어떻게 탄압했는지 글과 그림으로 보여준다. 알지 못하는 스페인어로 쓰였지만, 여자와 아이들이 줄줄이 묶여서 끌려가는 그림, 죽임을 당하는 그림, 절벽에서 떨어지는 그림을 보면 당시 무어인의 비참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은 서로 같이 살아가는 동네가 되었다. 골목을 걷다 보면 교회도 있고, 모스크도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는 동네가 되었다. 슬픈 역사는 슬픈 하얀색의 마을로 언덕 위에 아름답게 서있었다. 한 사람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열려있는 창문으로 집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집 안에 있던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치고, 나는 쑥스럽게 인사를 했다.
“울라”
네르하는 휴양도시이다.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들이 느리게 걸어 다니고, 천천히 밥을 먹고, 가끔 고요한 지중해를 바라보는 곳. 은퇴한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도시라고 한다. 그런데 의외로 아이들이 많았다. 네르하 광장은 아이들이 삼삼오오 공을 차고 있었다. 역시 축구의 나라 스페인이구나 했다. 광장을 지나 교회를 끼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니 이내 유럽의 발코니라고 불리는 해안가 전망대에 섰다. 전망대는 바닷가 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어 정말 발코니 같았다. 알폰소 12세가 명명했다고 하는데 잘 어울렸다.
“이 바다가 지중해야. 꼭 제주도 같지.”
“여기가 말로만 듣던 지중해구나. 제주도 바다와 별반 다름 없기는 하다. 시원하고 좋네.”
해안가를 따라 천천히 산책했다. 호텔 창가에 앉아 있는 사람도 보이고, 카페에서 차 마시는 사람도 보인다.
“아빠도 은퇴했는데 여기서 살지?”
“그럴까? 그런데 말이 안 통해서, 나는 수다를 떨어야 하잖아.”
“아빠가 잘하는 몸으로 말해요가 있잖아.”
“몸으로 말해요는 수다가 안 돼. 나는 말 통하는 한국에서 살련다.”
사람은 이런 곳에서, 이렇게 살아야지…. 이곳 사람들이 부러웠다. 시내로 들어가 길게 늘어선 가게도 구경하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광장에서 오랜만에 아이들 노는 모습도 구경했다. 아이들이 뛰며 노는 모습을 못 본 지 오래된 것 같다. 우리나라는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참으로 바쁘게 사는 것 같다. 여기나 우리나 똑같은 삶인데…, 안타까웠다. 태양이 아직도 뜨겁게 바다 위를 어슬렁거리며 고운 색을 흩어 놓았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그라나다로 향했다. 그라나다로 가는 길 위의 초승달이 선명하게 떴다. 이슬람인이 ‘진리의 시작’이라 여기는 달이었다. 그라나다에서는 타파스 투어를 할 예정이다. 초승달이 뜬 그라나다의 밤이 기대된다. 진리를 찾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