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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싸이코박 닥터 Oct 19. 2022

갑자기 찾아온 큰 아이의 질병

큰 아이의 질병 1

아모르 대학 병원에서 엘리아나는 다시 종합검사를 받고, 아침 일찍 수술실에서 응급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날 아침, 엘리아나가 수술대에 누워있는 동안, 나는 휴가 별장에서 엘리아나와 만날 준비를 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휴가를 보내기 위해 전날 봐온 장을 포함하여 모든 짐을 꾸리고 남아 있던 세 명의 딸들을 챙겼습니다.


우리는 아직 가족 여섯 명이 모두 탈 수 있는 큰 차가 없어 2대의 차로 휴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응급실에 엘리아나를 데려간 차는 오제의 병원에 있었고, 나는 남은 한 차에 별장에 다시 돌아올 일이 없게 끔 모든 짐을 꽉꽉 채웠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프랑스의 깊은 시골 아름다운 풍경과 자연환경에도 불구하고 너무 길게 느껴졌고 아모르에 도착하고서야 나는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짐 챙기랴, 애들 챙기랴, 이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했던 것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엘리아나 걱정에, 아이를 위해서라면 산이라도 들어 올릴 수 있을 엄마의 힘으로 일을 처리한 것 같습니다.


남편은 병실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엘리아나는 수술 후 여전히 회복실에 있었습니다. 시부모님도 오셨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 새로 생긴 규정 때문에 입원 한 어린이의 부모만 아이를 면회할 수 있어 손녀를 보지 못하셨습니다.


수술이 끝난 후 남편과 내가 만난 외과 담당의사는 그녀의 넉넉한 체격처럼 온화하고 평온한 태도로 그것이 큰 난소 종양이며 수술이 잘 진행되었고, 낭종은 크지만 모두 잘 제거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우리의 큰 딸이 입원실로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아이가 내 눈에 보이는 순간 나는 안심했습니다. 비록 딸의 아랫배에 큰 흉터와 몸에 연결된 소변주머니, 모르핀 펌프가 보였지만 그 순간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이런 심정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여전히 많이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일주일 동안 딸의 병실에 머물렀습니다. 부모 중 한 명만, 입원한 아이와 함께 방에서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병원에 있는 친지의 방이란 곳에 머물렀고(입원 병동에서 도보로 10 분 거리) 우리는 슬프게도 병원의 식당에서 결혼 10 주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딸이 건강하게 회복하고 있어 기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날 밤은 큰 딸이 야간 공황을 겪었고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처음 겪는 상황에서 딸을 안심시키는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야간 간호사들도 왔지만 아이를 진정시키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큰 딸은 수술에서 매우 빨리 회복했습니다. 참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성인이라면 이렇듯 빠르게 회복하는 것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며칠 후 그녀는 모르핀도 빼고 침대의 기둥에 매달려 놀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아직 상처가 완벽히 아물지 않았기 때문에 웃긴 일이 생기면 오히려 화를 내곤 했습니다. 웃으면 수술한 배가 땅겨 아팠기 때문이었습니다.


병실에 다른 입원환자들을 위한 자리가 더 필요해지고, 딸의 상태가 점점 더 좋아지면서 일주일 후 우리는 병원에서 완전히 쫓겨나 퇴원을 해야 했습니다. 아이는 아직 평소처럼 걸을 수 없었고 노인네의 걸음걸이처럼 허리를 구부린 채로 살금살금 걸어 다녔습니다. 수술에서 완전히 회복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일주일 후 해부학 적 병리학의 결과를 얻기 위해 외과 담당의사와 약속을 정했습니다.


남편은 우리를 위해 실패한 휴가를 대신할 작은 나들이를 계획했습니다. 관광 열차를 타고 애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따뜻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당시의 사진에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면, 아무도 아무런 눈치를 채지 못할 겁니다.

한동안 내 핸드폰 바탕화면 사진이었습니다.

큰 셋 딸들이 관광 열차의 놀이터에서 등반하는 보트와 같은 곳을 연상시키는 둥근 구조물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는 사진.

큰 딸은 여전히 그녀를 아프게 하는 흉터가 눌리지 않기 위해 느슨한 팬티, 느슨한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나는 아모르에서 의대를 다녔기 때문에 해부학 병리학 연구소의 교수님께 연락하여 아이의 조직 검사 결과를 내 개인 이메일로 직접 보내달라고 부탁했었지만, 약속 날까지 이메일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나중에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외과 의사와의 약속 당일, 우리가 큰 딸, 유모차에 실은 막내딸과 함께 의사의 친찰방 문을 염과 동시에 나는 암이라는 것을 바로 알았습니다. 외과 담당의사와 다른

한 명의 의사가 함께 우리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유명한 암 소아과 전문의를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밤색의 긴 머리, 키는 작지만 여성스러운. 짧은 치마와 굽이 높은 힐을 신은 그녀는 활기차고 성실한 목소리로 아이의 상태에 대해 우리에게 설명했습니다. 그 후 엘리아나에게도 알기 쉽게 다시 한번 설명해 주었습니다.


전이 검사와 항암 치료에 대해 듣고 우리는 마치 두개골에 타격을 입은 것과 같이 깜짝 놀랐습니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고, 믿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녀가 엘리아나에게 암 선고에 대해 엄마와 아빠가 슬퍼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설명해 주는 것을 듣고 그 의사에게 더욱 호감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감정적으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다음 주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길고 끔찍한 일주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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