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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Jun 30. 2024

돌보는 자와, 돌봄 받는 자, 그들의 동기화

5. 무라세 다카오 <돌봄, 동기화, 자유>

2024 서울국제도서전에 다녀왔다. 한 출판사 벽면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나의 삶을 돌본 것은 ______ 이다."


빈칸에 넣을 수 있게 여러 카드가 걸려 있었고 거기에는 '질문', '공간', '포옹', '균열', '사랑과 고통' 등이 쓰여 있었다. 요즈음 진정, 돌봄이 화두다. 나를 돌보고, 너를 돌보고, 남을 돌보고.


<돌봄, 동기화, 자유>, 제목의 담백함 때문에 호기심이 생겨 읽게 된 책이다(역시, 책 제목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나는 우습게도, 제목에 있는 '동기화'를 '동기 부여'를 말할 때의 그 '동기'라고 생각했다. '돌봄 할 동기'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니었다. 여기서 말하는 동기란, 메일함과 클라우드를 동기화하는 그 동기화였다. 참, 나, 원. 내 머릿속 어휘 세계란, 생각 보다 더 좁을지도 모르겠다. 


저자 무라세 다카오 씨는 노인요양시설 <요리아이의 숲> 총괄 책임자다. 남성이고, 요양보호사다. 젊은 남자 요양보호사에게 인지증이 온 노인들을 돌보는 것은 참, 매우, 고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저자는 차근차근, 그들과 어떻게 '동기화'했는지, 그들에게 어떻게 자유를 줄 수 있었는지, <요리아이>의 돌봄에 대한 세계관을 말하고, <요리아이>가 만든 유니버스를 이야기한다.


<교감하는 몸들> 챕터에서 저자는 우리와 할머니는 돌봄을 통해서 10년 넘게 서로 몸을 동기화해 왔다(153쪽)라고 말하고 몸과 몸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교감하기 시작한다(120쪽)라고도 말한다. 요양보호사의 돌봄은, 어린이집의 돌봄과는 확실히 다르다. 하지만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돌봄이라는 것만은 공통된 사실이고, 그래서 그들은 교감을 해야 한다. 교감이 되지 않고 의사소통도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돌봄이 아닐 것이다. 연장선 상에서 저자는 또 말한다. 간호, 요양보호, 돌봄, 뉘앙스는 다르지만, 서로를 구속하는 행위다(121쪽)'라고.


나는 한 동안 기업의 고객만족실에서 일했는데, 고객의 불만을 듣는 것이 별로 힘들지 않았다. 나는 고객들과 관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인이므로, 고객에게 사과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들의 불평을 들어주는 것은 그저 내 일이었다. 가족이 아니고 지인이 아니므로, 한 번 보고 지나칠 타인이므로, 나는 괜찮았다. 하지만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돌보는 일이라면, 그들이 불평하지 않고 나에게 화를 내지 않더라도 그건 분명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교감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번의 공감과 여러 번의 교감 중에 어느 것이 더 어렵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후자를 택할 것이다.


교감의 기본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익숙해지는 것. 더 솔직히 말하면 정이 드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는 것. 알게 되면,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돌봄 대상자와의 동기화가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동기화 전과 동기화 후의 돌봄의 질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반복해서 '사례로서'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한다. 설령 시간과 공간을 가늠하지 못하고, 기억이 어렴풋해도 '그 사람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144쪽). 인지증이 와서 더 이상 어제와 오늘을 구분하지 못해도, 자식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해도, 많은 세월 많은 사람이 '너답다'라고 말해주었던 그 무언가는 지속된다는 얘기다. 그걸 알아채려면, 돌보는 자는 돌봄 받는 자와 동기화해야 한다. 그런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는 데 몇 달이 필요했다 (145쪽) 다만 저자의 말처럼,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노력이 필요하다. 돌봄 받는 자의 안전을 위해 돌봄에는 많은 제어가 필요하고, 안전하지 못한 것은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생경한 단어를 여럿 만났고 생경한 표현도 여럿 만났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는 '치매'라는 단어 대신 '인지증'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노혼'이라는 단어도 이 책에서 처음 봤다. 나는 노혼을 '노인' 또는 '노구' 등으로 이해했는데 읽다 보니 아니었다. 노혼은 노혼(老昏), 즉 '늙어서 정신이 흐림'을 뜻하는 단어였다. 또 하나 '돌봄의 묘미'라는 표현은 매우 마음에 들었다. '돌봄의 묘미'라니. 나는 '돌봄'이라는 단어와 '묘미'라는 단어가 이렇게 어울릴 줄 몰랐다. 물론 아이를 돌보는 일에서 '돌봄의 즐거움' 또는 '돌봄의 맛' 정도는 연상할 수 있겠지만, '돌봄의 묘미'란 딱 봐도 보는 사람의 관점에 기인한 단어다. 돌보는 자와 돌봄 받는 자가 동기화하면, 그 성과로 '돌봄의 묘미'를 얻는다. 돌봄의 묘미는 하나의 행위를 두 사람이 함께 하는 과정에서 그때까지 몰랐던 '나'가 등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237쪽) 바로 이런 논리다.


물론 돌봄은 고단하다. 돌봄의 묘미가 있더라도, 그래서 돌봄 받는 자가 자유를 얻더라도, 그래도 노화한 몸의 노혼을 돌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속마음도 종종 말한다. 


바로 이런 속마음이다.

내 마음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기쁨, 안타까움, 신기함, 흥미로움 그리움..... 긴장과 피로 (279쪽)


그래서 나는 이 책이, 매우 절절하게 읽혔다. 돌보는 사람에, 동기화되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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