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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이에누
Dec 09. 2024
[진짜와 가짜 사이] 가짜어부의 노래
윤선도의 섬, 그리고 바다
보길도는 신이 남겨둔 마지막 비경이었지요.
그런 생각을 한 게 저뿐만은 아니었어요.
400여 년 전 고산 윤선도도 그렇지 않았겠어요?
서울의 폭염을 견디다 못해 낚시 장비를 트렁크에 싣고 남쪽으로 무작정
향했
습니다.
500킬로미터쯤 내리 달려
해남을 거쳐
보길도에
도착했어요.
윤선도를
생각하면서 그 섬에 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닐까요?
그는 병자호란의 포화를 피해 스스로 귀양을 자처하며 제주도를 향해 내려가다가, 남해의 어느 섬에서 우연히 절경을 마주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잖아요.
보길도는 전라도 땅끝 마을에서 보이는 황원포라는 포구에서 바라볼 수 있는 외딴섬입니다.
그 섬 어딘가에 구름 속에 연꽃을 덮어놓은 듯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고, 윤선도는 그곳에서 마음을 뺏겨버린 것이지요.
'부용동'—연꽃이 떠있는 동네라는 이름도 그렇게 붙었고요. 제주도로 가던 그의 발걸음은 거기서 멈춰버렸습니다.
섬길을 따라 드라이브를 하는 동안, 마치 섬 전체를 전세 낸 기분을 만끽했습니다.
귓가에는 온통 '지국총지국총' 배가 물결을 가르는 소리가 가득했지요.
전쟁의 혼란 속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무릉도원을 만나는 아이러니라니.
그곳에서 그는 낙서재, 동천석실, 세연정 등을 지어 신선처럼 낚시를 즐기며 은둔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보길도 세연정
어부사시사는 바로 그 절경 속에서 길어 올린 샘물 같은 작품입니다.
윤선도는 과연 방랑객이었을까요?
당시 정적들은 그를 '사치스러운 권력
의 도피자'라며 폄하하기도 했잖아요.
정말로 그가 향락을 일상으로 삼은 권력자의 삶을 살았던 걸까요?
어찌 됐든, 보길도는 정쟁의 포화를 피하며 얻게 된 또 하나의 오아시스였던 것은 분명해요.
노복과 여종의 시종을 받으며 자식, 손주들과 함께 화락을 나누고, 권태와 흥취를 탐닉하는 삶이 과연 귀양살이였을까요?
필자미상의 ‘가장유사’라는 글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오네요.
"부용동에 있을 때 닭 울음소리에 일어나 경옥주 한잔을 마시고 자제들에게 강의를 했다.
조반 후에는 사륜마차에 올라타 악기를 수행시키며 동천석실에 가서 놀았다.
가끔은 홀로 죽장을 짚고 노래하거나, 날씨가 좋을 때면 반드시 세연정에 올랐다.
이때 노비들에게 술과 안주를 준비시켜 작은 수레에 사람을 태우고 뒤를 따르게 했다.
자제를 시종으로, 어여쁜 계집아이들을 줄지어 세웠다.
작은 배를 연못에 띄워 동남녀들의 찬란한 채복이 수면에 비치는 것을 보며 어부사시사를 부르게 하였다."
보길도는 그야말로 신선의 땅이었지요.
모든 것이 구비된, 인간의 경계를 넘어선 삶의 공간이었습니다.
이토록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은둔처를 또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고산은 결코 소박하고 담백한 전원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조선조 사대부들 가운데 이만한 풍류와 호사를 누린 사람이 또 있었나요? 안빈낙도, 고고청빈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 같네요.
대지주 출신답게 보길도의 제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화려하고 호사스러운 생활에 젖어 있었고 그것이 그의 작품 도처에 배어 나오지 않나요?
자연속에서 유유자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퍼포먼스에도 능란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감정의 흥취를 절제하기보다는 멋지고 세련된 방식으로 표출하는데 익숙한 엔터테이너라고나 할까요?
"보길도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쪄 있다
닻 올려라 닻 올려라
넓고 맑은 물에서 마음껏 놀아보자
찌거덩 찌거덩 어기여차
인간세상을 돌아보니 멀수록 더욱 좋구나"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는 그가 65세에 보길도에 들어와 지은
작품입니다.
매 계절마다 10수씩 총 40수로 이루어진 어부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 과연 '진짜 어부'의 노래일까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당시 어부들의 삶은 생존을 위한 고된 싸움이었을 겁니다.
바다는 놀이와 여유가 아닌, 생존의 장이자 죽음의 무대였겠지요.
그런데 어부사시사 어디에서 그런 현실의 무게가 느껴지나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는 어쩌면 '가짜 어부'의 노래일지 모릅니다.
그가 보길도에서 누린 호사로운 일상의 일부였을 뿐, 진짜 어부들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죠.
이렇게 다시 보니, 윤선도의 보길도는 단순한 은둔지가 아니라, 그가 만든 또 하나의 무대였던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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