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낚시보다는 강과 호수에서 조용히 기다리며 낚시를 즐기는 저로선, 섬을 찾은 이유가 다소 허세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실리를 따지기보다 어쩌면 마음이 더 이끄는 쪽을 택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강이나 호수와 달리 바다에 둘러싸인 섬에서 낚시를 하는 건 또 다른 감각을 자극하니까요. 물고기를 잡는 것보다는 어부의 넉넉한 기운과 조사(釣師)의 무위자연을 만끽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섬은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물속 깊은 곳에서 전해오는 물고기들의 미세한 움직임을 느끼며 그들과 소통하는 시간. 마치 처음 늪에서 낚시터를 발견했을 때처럼 말입니다.
한강 이남의 늪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은 우포늪이었지만, 낚시 금지 구역이라는 이유로 진정한 즐거움을 누리기에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창녕의 주남저수지 역시 수려한 명당이었으나, 본류가 자연경관 보존 구역으로 지정된 뒤로는 하류 일부만 낚시가 허용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함안의 취무늪은 마치 신이 숨겨놓은 낚시꾼들의 보물 창고 같았죠. 갈대와 마름이 무성한 그곳에서 텐트를 치고 낚싯대를 드리우면, 마치 중국의 동정호나 베트남의 하롱베이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옛날에는 해남의 황원포에서 배를 타고 하루가 걸려 보길도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노화도까지 차를 싣고 배를 타면 보길대교를 통해 쉽게 들어갈 수 있지요. 고산 윤선도는 제주로 가던 길, 풍랑을 만나 우연히 보길도에 머물렀고, 그 아름다운 풍광에 반해 이곳에 눌러앉았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이곳을 10여 년간 18번이나 찾으며 세연정과 낙서재를 포함한 건물 25동을 짓고, 은둔하며 자연 속에서의 삶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 오우가와 어부사시사도 이곳에서 탄생했다고 전해집니다.
보길도에서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부용동의 세연정 앞 고즈넉한 소류지였습니다. 웅덩이인지, 연못인지, 아니면 늪 같은 느낌까지 더해지는 그곳은, 조용히 물고기와의 대화를 나누기에 더없이 적합한 장소라고 생각했습니다. 윤선도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었던 마음도 컸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섬을 일주하려던 마음을 잠시 접고, 안내판에 적힌 네 갈래의 길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윤선도 원림과 곡수당, 낙서재가 있는 부황리에서 시작해 부용리로 이어지는 길. 서쪽 뾰족산을 따라가는 해안길. 남쪽 예송리 해안길은 작은 자갈로 가득한 갯돌해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자갈들이 파도에 밀려 데굴데굴 구르며 내는 소리가 마치 섬의 오래된 노래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동쪽 송시열 글씐바위로 가는 길도 있었습니다.
청별항을 지나 예송리로 넘어가는 언덕에서, 수리봉과 적자봉 아래 활처럼 휘어진 예송리 갯돌해변을 마주했습니다. 그 위로 상록수림이 길게 펼쳐져 있었는데, 이곳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방풍림입니다.
낙서재는 윤선도가 글을 지으며 은둔했던 곳이었고, 그 맞은편에는 곡수당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윤선도의 아들이 지은 이 건물은 개울가에 돌다리와 연못이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길이 사방으로 뚫려 있지 않아 들어간 길을 다시 되돌아 나와야 했으므로 나머지는 천천히 둘러보기로 하고 우선 방향을 세연정으로 잡았어요.
세연정은 담양 소쇄원과 더불어 조선시대 최고의 정원으로 손꼽히지요. 고산이 인공 연못을 파고 정자를 세웠지요. 세연지에 단을 조성해 3칸짜리 정자를 짓고 세연정(洗然亭)이라 명명했던 거지요. ‘오우가’와 ‘어부사시사’의 산실이기도 하고요.
연못 위로 물이 빙글빙글 도는 회수담, 개구리처럼 생긴 바위, 그리고 물이 흐르는 굴뚝다리까지. 이 모든 것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세상의 때를 씻는다’는 세연지는 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에 판석으로 만든 보를 설치해 둑을 조성하고 자연적으로 수위조절이 되도록 조성한 연못이지요.
자신이 즐기려고 만든 세연정에서 날씨가 좋은 날이면 노비들에게 술과 안주를 마차에 가득 싣게 하고 기생들을 거느린 채 술 한 잔을 걸치고는 어부사시사를 읊조리는 모습을 상상해 봤습니다.
조선 최고의 풍류가인 고산 윤선도였지만 당시 양반가의 풍류와 더불어 도탄에 빠진 민생과는 동떨어진 타락상도 엿볼 수 있는 대목 아닐까요?
세연정에서 부용리 방향으로 2.3㎞ 가다보니 적자봉 아래에 ‘낙서재’와 ‘곡수당’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곡수당 위쪽에 지은 낙서재는 윤선도가 살았던 집으로 처음 이곳에 집을 지을 때는 수목이 울창해 산맥이 보이지 않았다는군요.
그래서 사람을 시켜 장대에 깃발을 달고 적자봉을 오르내리게 하면서 그 높이와 향배를 헤아려 집터를 잡았다고 해요. 고산은 이곳 낙서재에서 시문을 창작하고 독서를 하면서 은둔생활을 했던 거지요.
낙서재 건너편 산 중턱 절벽 위에는 부용동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답다는 ‘동천석실’이 위태롭게 걸려 있었어요.마을에서 20분쯤 산을 타고 올라가야 만날 수 있었는데, 동천(洞天)이란 산천이 아름답다는 뜻과 신선이 사는 곳 또는 하늘로 통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고산은 이곳을 부용동 제일의 절경이라 했고 절벽에 세운 한 칸짜리 정자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으며 신선처럼 살았다고 해요.
윤선도 원림이 있는 부황리 해안길을 따라 차를 달리다 보니까 몇몇 자그마한 마을이 나타났어요. 대부분 양식업을 하는 어촌 마을이었지요.
남해의 풍경이 오른쪽으로 넓게 펼쳐졌어요. 정동리 방파제 옆에 소나무가 제법 보이는 ‘솔섬’은 수반 위에다 소나무를 식재한 것처럼 그 자태가 수려했어요. 정동리를 지나면 바로 정자리였어요. 고산이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더군요.
추자도와 갈도, 옥매도, 미역섬, 상도 등 다도해의 수많은 섬을 먼발치에서 눈에 넣었지만 해가 넘어가기 전에 낚시터에 안착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일몰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더군요.
보길도는 모든 도로가 산뜻하게 포장되어 있어 섬을 일주하는 묘미가 제법 쏠쏠했어요.
퇴락한 선비가 자연경관에 심취해 연못을 파고 정자를 세워 선유를 즐겼던 비경 속으로 나는 그렇게 숨어들고 있었지요.
책읽고 글쓰고 강의하느라 지친 심신에 휴식을 선사한다는 구실을 달았지요. 400여년 전 고산의 행적을 따라서 고물 자동차 트렁크에 놀이도구를 가득 싣고 나름대로의 만행에 빠져 들어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