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트와 올리브 향 속에서 다시 시작된 나의 이야기
울려 퍼지는 아잔 소리에 잠이 깼다.
두 번째 아잔이니 벌써 정오가 가까운 시간이다.
잠결에 방 안을 가로지르는 느릿한 리듬은
이곳이 ‘한국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곳이라는 사실을
몸 전체로 느끼게 해 준다.
잠에서 덜 깬 채로 떠오르는 건
‘늦잠’에 대한 죄책감보다는,
한국에서 반복되던 야근과 주말근무에서
멀리 떠나왔다는 안도감이었다.
불과 두어 달 전의 일인데,
이미 아득한 옛일처럼 느껴진다.
밤낮 주말 가리지 않고 회사에서 먹고 자며,
요일과 계절이 바뀌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새벽녘 회사 화장실에서 졸음을 달래던 시절...
그래서일까,
몇 년 만에 즐기는 달콤한 늦잠은
그동안의 잃어버린 나의 조각들에 대한 작은 보상이라 생각하면
더 마음껏 누리게 해주고 싶었다.
지난 시간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은 나에게,
모로코의 아침 햇빛은 유난히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나는 지금 모로코에 와 있다.
서른다섯.
한국에서 ‘괜찮은 직장인’으로 살던 나.
이름만 말해도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다녔지만
실상은 누구도 부러워할 이유가 없는 삶이었다.
매일 밤 12시가 넘어서야 퇴근했고,
주말에도 ‘혹시 필요할지 모르니까’라는 이유로
회사를 벗어나지 못했다.
일이 정말 많아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같은 보고서를 형식만 바꿔 수십 번 다시 만들고,
임원의 말 한마디로 문서를 통째로 갈아엎는 날의 반복.
불합리함 앞에서도 “멀쩡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나의 영혼과 감각을 마비시키며 살아냈고,
“다들 아직 안 갔는데 네가 가면 안 되지 않겠나”라는 말들 속에
그래, 남들도 이렇게 사니까…라며,
내 안에서 올라오는 것들을 지그시 눌러가며 견뎠다.
그곳에서는 사람으로서의 시간과 삶이
애초부터 입밖에 꺼내지 말아야 할 금기사항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 결혼식을 하루 앞둔 밤이었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금요일 밤을 새우며 보고서를 고치던 나에게
리더는 이렇게 말했다.
“내일 꼭 동생 결혼식을 가야겠나.”
그 한마디가
그동안 이를 악물고 버티며 겨우 지탱해 오던 나를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은퇴하신 아빠의 첫 드럼 공연에도 못 갔고,
가족 여행에서도 나만 빠져야 했던 수많은 순간들.
그동안 잃어버린 시간들이 한꺼번에 스쳐갔다.
"나도 살아 있는 사람인데..."
삶의 이유를 부정당하자,
이미 무너지고 말라 비틀어진 내 안의 우물 바닥에서
마지막 한 방울 남은 나의 영혼이 나에게 힘겹게 속삭였다.
"할만큼 했어"
그날 이후,
가족의 반대와 주변의 의아한 시선을 뒤로 한 채,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모로코로 향했다.
마라케시 공항에 내린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끌림이 느껴졌다.
스파이스 향이 공기 속에 진동하고,
해 질 녘의 하늘은
적토로 만든 건물로 가득한 마라케시 전체를 아름답게 물들였다.
후각, 시각, 촉각...
이런 것들을 마지막으로 온몸으로 느껴 본 게
대체 언제였던가.
낯설지만, 너무도 강렬한 냄새와 색감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억눌러 살아온 마음이
뜻밖의 틈으로 새어 나오듯,
순간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곳에서 나는 3개월짜리 아파트를 계약하고,
혼자 살아 보기로 결심했다.
모로코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아무에게도 쫓기지 않는 하루.
빠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급할수록 느려지고,
답을 찾으려 할 수록 그곳에 갈 수 없다.
인샤 알라.
억지로가 아닌, 흐름에 맡기는 삶.
그러한 단순하고 원초적인 삶이,
나에게는 필요했던 것 같다.
전날 시장에서 산 민트를 꺼내자
상큼한 향이 폭발하듯 방을 채웠다.
아틀라스 산맥에서 매일 가져오는
야생에 가까운 민트라 했다.
정성스레 시간을 들이며 물을 끓여 민트 티를 만들고,
집 앞 베이커리에서 사 온 구수한 빵도 데웠다.
마침 내가 도착한 12월은 올리브 수확철이었다.
동네 야채 가게 아저씨는
자신의 농장에서 가족끼리 먹으려고 수확하고 짜둔 올리브 오일을
소박한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동네 단골들에게만 판매하였다.
뚜껑을 여는 순간,
푸릇하고, 향긋한 올리브 향이 코를 타고 번지며
머릿속 깊은 곳을 은은하게 흔들었다.
햇볕 자체를 짜낸 것처럼 따뜻하고 깊은 향.
순간적으로 머리가 어질할 정도의 농도.
모로코의 강렬한 햇빛을 받고 자란 올리브의
복잡한 풍미가 터져나왔다.
이 모든 것이 1달러도 되지 않는,
모로코에서는 누구나 누리는 일상에 불과했지만,
따뜻한 민트티를 입안에 머금고,
부드러운 빵을 올리브 오일에 듬뿍 적셔 입에 넣는 그 순간,
아주 희미하게—
내 몸 어딘가에서
작은 온기가 스며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향에는 내 지난 생활과는 정 반대의 삶이 있었다.
새벽 한시에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회사 데스크에 앉아 햄버거를 우겨 넣고,
무슨 맛인지도 모를 커피를 입에 쓸어 넣으며 밤을 버티던 나.
그러던 내가,
대지의 축복으로 태어난 민트, 빵, 올리브 오일을 온전히 음미하며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텅 비어 폐허가 되어 버린 줄 알았던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형체 모를 무언가가 꿈틀, 하는 게 느껴졌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앞으로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
그땐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작은 두근거림이
나를 앞으로 이끌어가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서서히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곳에서의 작은 아침 한 끼가
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거라는 것을.
그리고,
내 인생의 중심이
조용히, 그리고 확실히
모로코로 기울어 가고 있다는 것을.
✦ 각주
아잔(Adhan) — 이슬람 문화권에서 하루 다섯 번 울려 퍼지는 기도 소리. 보통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며, 마을과 도시의 하루 리듬을 만들어 준다.
인샤 알라(Insha’Allah) — ‘신이 원하신다면’이라는 뜻의 표현으로, 아랍·이슬람 문화권 전반에서 쓰인다. 특히 미래를 자신의 계획보다도 흐름과 신의 뜻에 맡기는 태도를 잘 드러내는 말이다.
✦ 〈모로코에서 내가 된 날들〉 시리즈
01. 인생을 되찾아준 향기
02. 구글맵으로 갈 수 없는 카페 — 2025.12.09 19:00(KST)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