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케시 Souk에서 갑자기 레벨 업 한 날
모로코 생활은 처음이었고,
친구도 없이 혼자였지만,
이상하리만큼 심심할 틈이 없었다.
매일매일이 새로웠고, 하루하루가 작은 모험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모로코인지 모나코인지 모를 나라에 혼자 가 있는데 안무서워? 외롭지 않아?”라고 물었지만
솔직히 그런 생각이 끼어들 자리가 없을 만큼
예상치 못한 해프닝의 연속인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너무도 향긋한 민트티를 매일 마시는데,
예쁜 잔이 없는 게 너무 아쉬웠다.
며칠 전 Medina에 있는 Souk에서 본,
반짝거리는 예쁜 잔들이 떠올랐다.
"아 저런 이국적이고 예쁜 잔에 담아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바로 민트티 잔을 사러 길을 나섰다.
Souk에 들어서자,
여느 때처럼 혼돈과 밀려오는 호객꾼들이 앞길을 막았다.
"아니에요. 질라바에는 관심 없어요"
"바부슈 사러 온 게 아니라니깐요!"
그들의 끈질긴 권유와 밀려오는 인파에 열심히 저항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라케시의 Souk은 얼핏 보기에 가게 구성이 랜덤한 것 같지만
나름 파는 상품별로 구획이 나뉘어 있다.
카페트 파는 곳,
향신료 파는 곳,
가죽공예 파는 곳,
철 공예를 파는 곳.
오늘 내가 갈 곳은 민트티 잔과 Teapot을 파는 구역이다.
인파와 호객꾼을 헤치고 목적지에 도착하자,
예상했던 대로 아름다운 광경이 눈을 반겼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올 것 같은
반짝거리는 은빛 Teapot과 Tray,
빨주노초파남보 다양한 색상의 민트티 잔들...
색상과 반짝거림의 조화가 너무 눈부셔서
그저 밖에서 가게만 보고 있어도 뿌듯했다.
기대에 부풀어,
이 가게 저 가게 들어가서 구경해 보았지만,
얼핏 보기에는 예쁜 잔이 많아 보였는데,
막상 내 집에서 차를 마실 잔을 산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어느 것도 마음에 딱 와닿지 않았다.
어떤 것은 색이 마음에 안 들고,
어떤 것은 무늬가 너무 화려했다.
살짝 낙심한 마음을 뒤로하고,
어쩔 수 없이 오늘은 그냥 돌아갈까,
하고 출구 쪽으로 향하는데...
그때, 한 가게의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유난히 장난끼 많아 보이는 그 아저씨는
나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고,
수다쟁이 아저씨의 말솜씨에 이끌려,
한두 마디 나누기 시작한 우리는,
서로 서툰 불어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아저씨가 물었다.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어?”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네, 여기엔 없는 것 같아요.”
그러자 아저씨가 믿기 힘든 말을 내뱉었다.
“기다려봐, 내가 네가 좋아하는 걸 가져올게.
가게 좀 보고 있어.”
...그리고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거대한 미로 같은 Souk 속으로 훅-사라졌다.
... 진짜로 사라졌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순식간에,
수천 개의 상점과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 한가운데,
익숙하지 않은 수만 마디의 아랍어 사이에,
민트티 잔 가게의 카운터 안에,
동양인 여자 하나가 덩그러니 남겨졌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오가고,
흥정 소리는 사방에서 시끌벅적.
반짝이는 은빛 트레이와 찻잔들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만인의 시선을 받으며 이방인인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아니...내가 나쁜 사람이면 어쩌려고?”
"계산대 안에는 현금도 그대로인데..."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가게를 맡길 수 있는 건가?"
내 머릿속은 물음표 투성이가 되었고,
아저씨의 ‘대책 없는 신뢰’ 앞에서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다 보니
문득—눈앞의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느린 시간 속에,
관광객의 눈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도시의 일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호객을 하던 앞가게 아저씨는
손님이 없자 가게 안으로 들어와 차를 따르기 시작했고
그 옆 가게 아저씨는
주문한 타진을 받아 또 다른 가게 주인과 즐겁게 담화를 하며 나눠 먹기 시작했다
억지로 앉혀진, 가게 주인 자리.
처음엔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었지만,
아저씨가 억지로 앉혀놓은 가게 안에서
그들이 차를 마시고, 점심을 먹고,
나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는 것을 보고 나니,
도시가 왠지 살짝 친숙하게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나는 이 도시 밖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군가의 가게를 지키고 있다.
마치 오랜 시간 이곳에 살았던 사람처럼...
5분, 아니 10분쯤 지났을까,
아저씨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손에는 어디선가 급히 구해온 반짝이는 찻잔이 들려 있었다.
아저씨에게는 미안하게도,
안타깝게도 찻잔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이것도... 예쁘긴 한데, 제 취향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자, 아저씨는 전혀 실망한 기색 없이,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다시 농담을 던지며 수다를 이어갔다.
그 순간, 문득 내 모습이 우스워졌다.
여기서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모로코에 온 지 일주일 만에
미로 같은 Souk에서 남의 가게 주인 노릇까지 하게 될 줄이야...
RPG 게임으로 치면
필드에서 메탈 슬라임을 만나
갑자기 레벨이 30쯤 오른 느낌이었다.
이렇듯 모로코에서의 사람들과의 유쾌한 만남 덕분에
나는 레벨도 팍팍 오르고,
단 하루도 심심할 틈이 없었다.
민트티와 올리브유에 빠져
이곳에 살아보고 싶어진 나.
결국 그 민트티 잔을 찾으러 온 Souk에서
또 한 번 나는 이 도시의 장난스러운 꼬임에 빠져버렸다.
“여기야. 이 자리가 네 자리야. 빨리 앉아”
라고 도시가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낯선 곳에서 나를 가장 먼저 환영한 건, 언제나 사람이었다.
멀리서 온 이방인을, 자기 사람처럼 품어주는 나라.
이 도시가 나를 끌어들이는 방식은,
이렇게 엉뚱하고 다정했다.
자, 모로코에 온 지 고작 일주일 만에 혼자 Souk에서 가게까지 보게 됐으니—
앞으로는 또 어떤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인샤 알라.
모로코에서의 나날은,
이제 막, 아주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 각주
Djellaba(질라바) — 북아프리카 마그레브(Maghreb) 지역에서 입는 전통적인 길고 헐렁한 로브. 햇볕, 바람, 추위를 막아주는 북아프리카 기후에 적합한 형태의 실용적인 옷이지만, 종교행사나 결혼식 등 격식 있는 자리에서도 흔히 착용된다.
Babouche(바부슈) — 가죽으로 만든 모로코 전통 신발. 어원은 페르시아어 '파푸시(papush)'에서 왔다고 하며, 수백 년 넘게 축적된 모로코의 가죽 공예 기술을 통해, '모로코 신발'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다.
Tajin(타진) — 모로코의 국민식으로, 북아프리카 마그레브(Maghreb) 지역에서 즐겨먹는 요리. 원뿔 모양 뚜껑이 있는 토기 냄비에 다양한 재료를 담아 천천히 스튜 스타일로 끓여낸다.
✦ 〈모로코에서 내가 된 날들〉 시리즈
03. 내 가게를 지켜줘
04. 마라케시에서 몸을 맡기다 — 2025.12.23 19:00(KST)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