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어야 보이는 길
그 날은 모든게 완벽했다.
늦잠 자고 일어나, 행복한 아침까지 먹고 나니,
몸도 마음도 이상하리만치 든든했다.
늦게 일어났다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고,
누가 야근하라고 보채는 사람도 없는,
하루 종일 온전한 내 시간.
기분이 좋아서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한 카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
테라코타 벽, 세월이 새겨진 천장,
"16세기 역사적 건축물"이라는 설명까지.
관광객 모드가 즉시 활성화됐다.
사진 찍어 페북에 올리면 기가 막힐 것 같았다.
“와... 여기 진짜 예쁘다! 꼭 가야 해!”
구글맵을 검색해보니 위치도 정확히 나왔다.
Souk 안쪽으로 꽤 깊이 들어간 위치라는게 마음에 걸렸지만
방향은 단순했다.
Argana 카페 뒤로 직진.
‘이 정도면 껌이지.’
나는 복잡한 일본·뉴욕 지하철 환승도 척척 해내던 여자아닌가.
그날도 아무 걱정 없이 집을 나섰다.
아침의 Medina는 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가게의 닫힌 셔터들, 열지 않은 가판대들,
밝은 햇빛만이 조용한 광장을 잔잔히 비추고 있었다.
‘아, 오늘은 진짜 운이 좋은 날이네.’
콧노래를 부르며 Souk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들은 간간히 있었지만,
그날따라 내 소매를 잡아 끄는 호객꾼도,
치근덕대는 남자들도 없었다.
"뭐야, 나 이제 현지인 포스 좀 나나?"
귀찮게 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에 신이나
지도를 따라, 익숙한 Argana 뒷길을 직진해,
20분쯤 걸었을 때였다.
구글맵이 가리키는 직진의 끝—
구글맵이 가리키는 직진의 끝에는,
길이 아니라,
거대한 카페트 가게 하나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왜… 길이 없지?'
'구글맵이 틀릴 리가 없는데…'
'틀린 건 위치정보?… 아니면, 설마 나?’
좌로, 우로, 뒤로...
맵을 바로잡겠다고 애썼지만,
30분 후 나는
지도에도 없는 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천년의 역사를 이어온 거대한 미궁 안에서
내가 믿어온 현대 테크놀로지는
완전한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좌측으로 가면 우측으로 빠지고,
가까워지려고 하면 멀어지고,
멀리 가려고 하면—
이번엔 아예 Souk의 반대편 출구를 향하고 있었다.
Souk은 내 의지를 비웃듯
매번 나를 전혀 다른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동서남북이 의미 없는 곳.
이곳의 길은,
내가 아는 방식으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왼쪽·사잇길·뒷골목을
끝없이 돌고 돌아
“구글맵이 가리키는 그 방향”만 믿고 걷기를 다시 30분.
나는
아까 그 카펫 가게 앞에
정확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시 서 있었다.
'여기는, <네버엔딩 스토리>에 나오는 망각의 도시인가?'
'이건 뭐, 기억이라도 바쳐야 빠져나갈 수 있는 건가?'
갑자기 식은 땀이 흐르며,
다리가 풀렸다.
아무리 가도,
아무리 돌아도,
원하는 곳으로도, 밖으로도 나갈 수 없을 거 같은 공포.
마치 다른 세계에 떨어져 버린 나.
그때 Souk이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안심해.
목적지에 도착하려는 그 마음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된 거야.
아니면, 너는 정말로, 네가 어디로 향하려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 이제는 시장마저 나를 가지고 노는구나.”
내손에 있는 구글맵이 너무 원망스러워,
홧김에 핸드폰을 껐다.
"어차피 쓸모도 없는 것!"
의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 같으면 절대 앉지 않았을 남의 가게 의자.
하지만 그날은
피곤함과 절망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아…”
핸드폰 하나 믿고 이리 저리 다니면서,
길을 잘 찾는다고 믿었던 어리석은 자신감은
이 미궁 앞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간절한 마음으로,
"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이시여,
제발 오늘 집에 무사히 돌아가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
그 순간—
무언가가 시야를 스쳤다.
그 자리에—
"...응?"
방금까지는 보이지 않던 위치.
아까는 다른 가게 간판에 가려
서 서는 볼수 없었던 위치.
하지만 정확히 의자에 앉은 이 각도에서만 보이는,
작은 나무 표식 하나.
희미한 글씨와 화살표.
...바로, 그 카페 이름이었다.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내가 애써 길을 찾고 있을 때는
끝내 모습을 숨기던 표식이,
길을 잃고 멈춘 이 순간에야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Souk이 나에게 다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제야 네가 볼 준비가 됐구나.”
표식을 따라 첫 발을 내딛자
방금까지 뒤틀려 보이던 공기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골목은 여전히 조용했다.
관광객이 실수로라도 들어올 일은 절대 없을 것 같은,
사람 하나 지나가지 않는 텅 빈 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고,
길은 더 이상 나를 시험하지 않았다.
지도 없이 걸었지만
‘이 길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몇 번의 모퉁이를 돌아
드디어 그곳에 도착했다.
아무 장식 없는 나무문.
미궁의 심장처럼 숨어 있던 문.
문틈 사이로
다른 세계의 향이 흘러나오는 듯한
따뜻한 공기가 스며왔다.
똑, 똑, 똑.
두드리자 문이 열렸고,
흐트러지듯 퍼지는 오렌지 꽃 향기,
리드미컬한 분수 소리,
역사에 걸맞는 테라코타 벽에 내려앉은 빛이
나를 감싸며 맞아주었다.
현실의 뒷면으로 들어온 듯한
비현실적 공간.
마치 차원 이동을 해 온 것 같았다.
카페 안에는
나보다 먼저 미궁의 퀘스트를 클리어한 단골들이
고수다운 모습으로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조심히 소파에 앉아
과일 샐러드를 주문했다.
접시에서 피어오르는
계피와 로즈워터의 향,
중정의 오렌지 꽃 향기와 섞여
어지러울 만큼 황홀했다.
“아… 이 향을
사진 속에 담아 가져가고 싶다~."
"미궁을 헤맨 보람은 있네… 진짜."
방금 전의 피로와 혼란은
모래처럼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미궁이 보여준 것...
하지만, 기이한 여운은 한참 동안 가시지 않았다.
한 번도 보이지 않던 표식, 아무리 애써도 닿지 않던 카페.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도시들에서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꿈이었나?”
하지만 그건 꿈도, 마법도 아니었다.
미궁 같은 Souk은
나를 길 잃게 했고,
그 길잃음을 통해
나를 가장 정확한 장소로 데려다 주었다.
손안의 핸드폰만 쳐다보며,
직선으로만 가던 삶.
효율을 따지며,
목적지만이 중요했던 삶의 방식을 내려놓고,
거리의 리듬에
도시의 흐름에
그들의 시간에
내 몸을 맡겼 때...
그제야 비로소 길이 열렸다.
도시가 나를 데려다 준 길 위에서,
나는 아주 조용히 깨달았다.
방향은 지도로 찾는 게 아니라,
결국엔 내가 스스로 찾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Souk은 그 사실을
가장 모로코다운 방식으로 알려주었다.
이곳은 모로코.
논리로는 풀리지 않는 마법이
이따금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신비경으로
나를 인도하는 곳.
당신도—
미궁의 챌린지를
받을 준비가 되셨는가?
✦ 〈모로코에서 내가 된 날들〉 시리즈,
다음 이야기는 다음주 화요일 저녁에 만나보세요!
✦각주
Souk(수크) —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에서 전통 시장을 이르는 말. 미로처럼 복잡한 골목과 작은 상점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마라케시의 심장 같은 공간.
Medina(메디나) — 아랍어로 ‘구시가지’를 뜻한다. 성벽 안쪽에 형성된 옛 도시로, 마라케시의 일상과 역사가 가장 진하게 살아 있다.
✦ 〈모로코에서 내가 된 날들〉 시리즈
02. 구글맵으로 갈 수 없는 카페
03. 내 가게를 지켜줘 — 2025.12.16 19:00(KST)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