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도 괜찮았던 순간
차도는 차가 다니는 길,
인도는 사람이 다니는 길,
이건 뭐, 운전면허 안딴 어린이라도 아는 기본 상식이다.
...라고 나도 생각했었다.
마라케시에 올 때까지는...
마라케시 거리를 걷다 보면,
자동차와 보행자 만이 아닌,
너무도 많은 이해 당사자들이 길을 같이 사용한다.
택시, 트럭, 오토바이, 자전거, 손수레, 사람은 물론,
마차, 당나귀, 양떼 무리, 낙타에 고양이 까지...
어느 나라 도로 전문가도,
이런 사용자들까지 고려해 규칙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동물들은 신호 같은 건 모른다.
본인들만의 페이스로 유유히 도로를 점유할 뿐.
그들이 무대에 나서면
거리는 완전히 혼돈의 카오스—
...가 될 것 같지만
"응? 나름 잘 돌아가고 있는데"
그렇다.
마라케시의 도로는, 오늘도 혼란스러웠지만,
도로는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고 어떻게든 돌아가고 있다.
날렵한 오토바이 운전자는 천천히 달리는 마차를 슬쩍 피해가고,
당당한 당나귀가 자신만의 타이밍으로 길을 건너기 시작하면,
씽씽 달리는 마라케시 베테랑 택시 기사 아저씨도,
운전대 위에서 한숨을 쉬며, 그들이 길을 다 건너기를 기다린다.
도로는 마치 복잡한 또하나의 생태계 같다.
길에서는 신호등만 보면 되는게 아니라
눈치도 봐야하고,
기다릴 때는 기다려야 한다.
누구에게도 예외는 없다.
어느 날 녁,
택시를 타고 가고 있는데,
길 한복판에 모든 차들이 멈춰 서있었다.
파란 불이 됐는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앞을 보니
하얀 양떼 한 무리가
유유히 길을 건너고 있었다.
다른 차 운전자들은
오른손을 위로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고,
(신세 한탄할 때 쓰는 모로코 사람들 시그니처 포즈)
택시 기사 아저씨는 나를 돌아 보며
마라케시에서 택시 기사 해먹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과장되게 늘어 놓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와서 욕하는 사람들도,
빵빵거리는 사람들도 없었다.
양떼가 다 건널 때까지
모두가 한마음으로,
양들의 빠른 무사 횡단을 기도하며
그냥—기다렸다.
서울이었다면
분명 “아, 뭐하는거야…” 하며 모두 짜증부터 냈을 텐데,
여기는—
스무스한 리듬속에 어떻게든 흘러 간다.
하긴, 어쩌겠는가.
양들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들은 그들의 페이스로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마음을 내려놓고 기다리자,
양떼가 다 지나가고 있는 길 뒤로,
저녁녘의 오렌지색과 남색이 겹겹이 번지는 하늘이 보였다.
그라데이션 위에 놓인 양의 하얀 양털이
참 잘 어울렸고, 예뻤다.
양들이 지나가지 않았으면,
길가느라 바빠서,
하늘따위 올려다 보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예쁜 광경을 보다니
"오늘 참 운이 좋네?"
그 순간, 내 어깨가 편안하게 내려앉는 걸 느꼈다.
수년간 잊고 살았던 자세였다.
길은 멈춰있는데,
내 마음은 스르륵 흘러가기 시작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굴러가는 세계가 있다.
길 위에서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 본게 언제였던가.
한국에서의 나는 늘 정해진 속도를 맞추느라 숨이 찼다.
신호가 바뀌면 1초만 늦어도 찾아오는, 뒤차의 경적과 비난.
몸이 아파 버스에 천천히 올라타는 날엔, 사람들의 표정이 삐그덕거렸다.
나의 속도가 아니라,
흐름을 끊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모두가 같이 사용하는 마라케시의 길 위에서는
완벽함도, 효율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1분간의 멈춤이, 비난이 아닌 휴식이 되었다.
규칙만으로 잘 돌아가는 사회도 있다.
모두가 비슷한 규격일 때, 사회는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사회에는, 규격이 일정하지 않은 구성원들도 존재한다.
당나귀, 양떼, 마차, 손수레,
어린이, 노인, 병 중인 사람처럼...
그리고, 꼭 교통 약자가 아니더라도,
천천히 가고 싶은 날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은가?
하늘이 너무 푸르러서 기지게를 켜고 싶은 날,
따뜻한 햇살을 공원 벤치에 앉아 음미하고 싶은 날,
또는, 어쩌다 약간의 위로가 필요한 날...
모두가 같은 속도로만 갈 수는 없다.
가고 싶지 않은 날도 있고,
갈 수 없는 날도 있다.
이곳에서는
규칙만으로 가기에는
이해당사자가 너무 다양했다.
그래서, 신호등 대신에,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동물 사이의 보이지 않는 작은 합의가
도시의 흐름을 만들고 있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각자 자기만의 속도로 가도 괜찮았다.
자로 잰듯한 반듯한 세상 밖으로 살짝 눈을 돌리자,
서로가 각자의 속도로 사는,
서로가 대화하면서 공존하는 세상이 눈에 보였다.
이 도시의 길은
모든 속도를 품고 있었다.
빠른 사람도, 느린 사람도.
급한 오토바이도, 졸린 당나귀도.
그리고… 나처럼 낯설어서 자꾸 헤매는 외국인도...
이 도시는, 모두가 제각각의 속도로 걷는 세계를 보여주며 내게 물었다,
“자, 어떻게 길을 갈지는 네가 정해야 해"
멈출지, 비킬지, 기다릴지—
정답은 없고
선택만 있는 게임.
나는 그 안에서, 남에게 맞추지 않은 나만의 속도를 선택해보고 싶어졌다.
완벽할 필요가 없고,
정답일 필요도 없는.
그렇게 가도 된다고
도시가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요지경 길 위에서,
또 어떤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까.
양떼를 만날까.
당나귀와 함께 길을 건널까.
오늘도 나는 길을 나선다.
정답은 없고, 선택만 있는 길을,
모두의 속도를 품어주는 도시에서,
나도 당당하게 나의 속도를 찾아보고 싶어졌다.
✦ 〈모로코에서 내가 된 날들〉 다음편 예고
교통의 카오스를 지나면, 이제 택시의 세계가 열린다.
“원하는 곳에 갈 수 없는 택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모로코에서 내가 된 날들〉 시리즈
05. 도로 위 요지경
06. 원하는 곳에 갈 수 없는 —2026.02.03 19:00(KST)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