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케시 택시 챌린지
본래 택시란,
내가 가고 싶은 곳에 편하게 가고 싶을 때 이용하는 교통수단 아닌가.
하지만 이런 상식은 마라케시에서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특히, 외지인에게,
관광객에게,
이 사정은 더 가혹하다.
카오스가 미학인 이 도시에서
초보자가 원하는 곳에 도착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내가 방을 구한 곳은
Daoudiate라는, 마라케시 대학이 있는 대학가이다.
생활 편의 시설이 많아
평소에는 택시를 탈 일이 거의 없지만,
가끔 Medina에서 쇼핑을 하고 싶을 때면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야만 한다.
이런 날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만 하는 날이다.
목적지가 정확히 어디인지,
얼마를 내야 하는지,
잔돈은 정확히 있는지(거스름돈 없게),
어느 정도의 아랍어를 섞어야
관광객처럼 보이지 않을지.
택시 타기 전부터
머릿속으로 다차원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그날은 자잘한 선물들을 사기 위해
외출에 나선 날이었다.
Ensemble Artisanal은
마라케시 Souk에서 볼 수 있는 공예품들을
한 곳에서 살 수 있도록 모아놓은 곳이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정찰제로 판매가 된다.
가격이 엄청 싸거나
물건이 다양한 편은 아니지만,
Souk에서 벌어지는 흥정과 바가지를 피할 수 있어서,
사고 싶은 물건들이 비교적 정해져 있고,
스트레스 없이 쇼핑하고 싶을 때
가끔 이용하는 곳이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큰 길가로 나가 택시를 잡는다.
일부러 익숙한 척
과장된 몸짓으로 택시를 올라타고,
아랍어로 인사를 한 뒤,
Ensemble Artisanal까지 가달라고 말을 한다.
그러자, 어느 정도 예상 했던 대답이 돌아온다.
아저씨 : "Ensemble Artisanal? 월요일은 안 하는 날이야. 내가 더 좋은데 데려가 줄게"
나: "에이. 안 하긴요. 저 지난주 월요일에도 갔는데, 하던데요. 거기로 가주세요."
아저씨 : "아니야, 오늘은 국경일이라서 거기 안 해. 내가 더 좋은데 알아, 글로 갈게."
마라케시 택시 기사들은
자기가 커미션을 받는 기념품 가게들이
한두 군데쯤은 다들 있다.
손님이 물건을 살 것 같은 기미가 보이면,
어김없이 자기가 커미션 받는 가게 앞으로 데려다 놓으려고 한다.
이 설득에 밀리면
바가지 호구 직행이다.
참고로, Ensemble Artisanal 은
영업시간이 짧아서 그렇지,
특별한 공휴일을 제외하고는 쉬는 날이 없다.
웬만한 아저씨들은, 이쯤 돼 물러나는데,
오늘 아저씨는 꽤 강적이다.
작전을 바꿔야겠다.
나: "저 물건 사러 가는 거 아니에요. 사람 만나러 가요 "
아저씨: "거기서 사람 만날 일이 뭐가 있어. 물건 사러 가는 거잖아. 내가 더 좋은데 알아."
나:"아녜요, 정말 거기서 2시에 사람 만나기로 했어요. 빨리 가야 해요. "
아저씨 :"그럼 그 사람 픽업 해서, 둘 다 태워서 좋은데 데려다줄게"
... 이쯤 되면,
어떻게든 나를
자기가 아는 기념품 가게로
끌고 갈 작정인 듯하다.
기껏해야 15분의 탑승 시간인데
마치 1시간처럼 느껴진다...
실랑이를 벌이면서 동시에,
거스름돈 없이 잔돈이 있는지를 한번 더 확인하고,
내릴 때의 행동을 최적화해서 다시 한번 머릿 속에 그려본다.
아저씨의 말걸 여지를 최소화하고,
동작에 군더더기 없이
빠르고 스무스하게 내릴 수 있도록...
아저씨가 Ensemble Artisanal 앞에서 차를 세우자,
예상 시뮬레이션 대로,
재빠르게 문을 열고
잔돈을 거의 던지듯이 아저씨에게 건네주고는,
급하게 택시를 내렸다.
여기서 또 잔돈이 없었다면,
아저씨가, 거스름돈이 없다며,
또, "내가 아는 가게에 가서 바꿔올게~"를 시전 할 수도 있다.
잔돈은
항상 주행거리만큼
정확하게 준비를 해야 한다.
... 하아...
이미 마라케시에 익숙해서,
길도 다 알고,
택시비 사정도 알아도,
원하는 곳에 가려면 강한 의지와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어느 날,
한국에서 육촌 동생이 마라케시에 온다고 했다.
어디서 만날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제일 싸울 일 적고
스트레스받을 일 없는
Ensemble Artisanal에서 만나기로 했다.
전화로,
"가능하면 호텔에서 잡아준 택시를 타고 와"
라고 몇 번을 당부했다.
호텔에서 잡아준 택시는,
그래도 기사님들이 호텔 직원들과 친분이 있는 경우가 많아,
평판을 의식하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할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약속장소에서
30분을 기다려도,
1시간을 기다려도,
동생이 보이지 않는다.
모로코에서 임시로 산 핸드폰이 스마트폰이 아니어서,
국제문자나 카톡도 되지 않고,
와이파이도 불안정해,
가지고 온 한국폰으로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참다못해,
비싼 로밍비를 감수하고 전화를 걸자
당황한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Ensemble Artisanal에 있는데
언니가 안 보여요.
여기 2층인데..."
... 2층?
Ensemble Artisanal은 2층이 있긴 있지만,
굉장히 좁고,
파는 품목이 제한적이어서,
처음 간 사람은 2층에 잘 올라가지 않는다.
느낌이 쌔... 하다.
"거기 뭐가 보여?
뭐 파는지 말해줘 봐"
"어.. 이것저것 다 파는데,
에스컬레이터 타고 올라왔고,
앞에 사자상이 있어요"
헉...
에스컬레이터...
사자상...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사자상이 있는 곳은
택시 기사들이 관광객 커미션 받는
바가지 기념품 가게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아서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오라고 한 거였지만,
호텔 택시도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다.
"... 기다려 지금 갈게"
다행히 그 가게는 내가 있던 곳에서 멀지 않아서
금방 가서 동생을 만날 수 있었다.
만나서 같이 쇼핑이나 하려고 했지만,
동생은 이미 택시의 황당함에 굉장히 지쳐있는 상태여서,
우리는 구경만 하는 둥 마는 둥
바로 그곳을 나왔다.
마라케시의 생태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바이지만,
다름 아닌 내 가족이 이런데까지 와서,
어이없는 고생을 한다고 하니,
동생한테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동생한테 마라케시 좋다고
실컷 자랑했었는데...
나때문에 동생이 이런 일을 겪은 것 같아서
죄책감과 민망함이 교차했다.
이렇듯 마라케시에서는,
강한 의지와,
철저 준비 없이는,
절대로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다.
예의바름을 가장한 어설픔으로
사람들에게 끌려다니던 나,
우유부단함으로 이도 저도 아니던 나는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그런 어중간함으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기에,
어중간함을 모두 버리고,
나는 나날이 새로운 내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향과,
색채가 가득한
미궁의 도시 마라케시.
어리버리하게
향에 취해 방심한 순간,
바로 잡아먹힌다.
항상 눈을 뜨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곳.
그래도 나는
오늘도 마라케시의 택시를 탄다.
새로운 수련을,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듯이.
나의 의지를 시험하는,
마라케시의 택시 챌린지.
스스로의 우유부단함 앞에서
한 번쯤 멈춰 서 본 적이 있다면,
마라케시의 택시 챌린지가
당신에게 좋은 수련이 될지 모르겠다.
✦ 〈모로코에서 내가 된 날들〉 시리즈
06. 원하는 곳에 갈 수 없는
07. 같이 버틴 시간 —2026.03.03 19:00(KST)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