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에서 내가 된 날들 04.마라케시에서 몸을 맡기다

경계를 풀어준 하맘, 그리고 여신 강림

by Jin Young Park Nomade



마라케시의 12월 말 아침은 은근히 춥다.


낮에는 따뜻하지만,

아침 기온은 10도 남짓.


한국 기준으로는 그리 낮은 기온은 아니지만,
문제는 집이 열을 ‘내보내는’ 소재로 되어 있어서,
벽도, 바닥도, 공기도 차갑게 식어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면

몸이 오그라들고, 관절이 굳어버린 느낌이 들곤 한다.


그럴 때는…

한국 같으면 목욕탕 가서

뜨끈~한 물에 몸 한번 담그고,

때도 시원~하게 한번 벗겨내면 딱인데...


라는 얘기를 옆집 아줌마와 하고 있는데,


“Bath house?”


있단다.

바로 around the corner에.


"오호! 모로코에도 목욕탕이?!"


나는 얼른 갈아입을 옷이랑 샴푸, 비누를 챙겨

아줌마가 일러준 곳으로 향했다.



이천 년 전의 모습 그대로...


입구에 들어서자 로마 유적지에서나 봤을 법한

돔 모양의 건물이 나를 반겼다.


벽면에는 동양에서 온 여행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짙은 푸른색 타일이

수증기에 젖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전기 시설이 없는 원초적 건물 안에는

당연히 조명 하나 없었고,

오직, 천장에 뚫린 채광 구멍에서 들어오는 자연광만이

증기 사이를 뚫고 내려와 하맘 내부를 비췄다.


인위적 조명 하나 없이,

고대에서 이어져 온 방식 그대로 운영되는 공간.

그 단순한 구조가 오히려 더 신비로웠다.


“… 와, 알함브라 궁전의 목욕탕은 이런 느낌이었을까.”


공기를 가르는 뜨끈한 열기,

축축하게 스며드는 수증기,

누군가의 물 떠는 소리와 낮은 웃음이

층층이 겹쳐져 귀를 간질였다.


순간,

나는 21세기의 마라케시가 아니라

이천 년 전 여인들이 모여 몸을 씻고 시간을 나누던

고대의 시간 속으로 들어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들어가자마자 세계관 붕괴


감탄을 하며 앉을 곳을 찾기 위해,

안으로 안으로 향했다.


방을 두 개나 지나

마지막 방에 왔는데,

무언가 이상하다.


...욕조가 없다.

세면대도 없다.


오직, 거대한 방 한가운데

작은 수도꼭지 단 두 개가 있을 뿐이었다.


"오잉? 이걸로 어떻게 목욕을 하지?"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집에서 가져온 초대형 바께쓰를

방 안에 유일한 수도꼭지 앞에 줄을 세워 놓고

차례대로 물을 받고 있었다.


“뭐… 뭐지?”


한국식 ‘목욕탕 공식’이

3초 만에 Ctrl+Alt+Del 되는 순간이었다.



나를 구하러 오는 신비한 아줌마들


사태를 파악하느라,

한동안 우왕좌왕하며 홀로 서 있자,

어디선가 한 아주머니가 갑자기 나타나셨다.

(손님인지, 하맘 직원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큰 바께쓰 두 개를 내 눈앞에 ‘턱’ 내려놓았다.


“이거 써.”

라는 듯한 손짓.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을 싹 제치고
내 물부터 받아준다.

놀랍게도 아무도 나의 새치기에 불평하지 않는다.


수도꼭지 하나는 온수,

나머지 하나는 냉수.


온수를 콸콸 받고

찬물을 작은 대야로 받아 온냉수를 섞어서 쓰면 된다고

시범을 보여주신다.


물을 다 받자,

아줌마가 '때 밀 거냐'는 시늉을 한다.


고개를 끄덕이자

어디선가 또 다른 아줌마 등장.


“저리 가.”


라고 가리키는 방향을 가서 앉자,

검은 무언가를 마구 몸에 발라주시더니,

잠시 후, 이번엔 땅바닥을 가리키며 눕는 시늉을 한다.


"여... 여기?"


당황하면서 맨 바닥에 누우려 하자,

또 다른 아줌마가, 어디선가 나타나

바닥 장판을 스윽 깔아준다.


“돌아누워.”

"팔 들어"


때 미는 아줌마가 손짓만으로

나를 이리저리 움직인다.


나는 점점…
저항을 포기하고
그냥 흐름에 내 몸을 맡기게 되었다.


이끌리는 대로 Savon Noir를 바르고,

이끌리는 대로 장판에 눕고,

이끌리는 대로 때를 민다.


"으아악"


한국보다 거친 이태리 타월에,

피부가 벗겨질 지경이다.


아줌마가 한바탕 웃더니,

"Doucement?(프랑스어 : 부드럽게 해줄까?)"

이러신다.


“Oui, oui! Doucement, s’il vous plaît…!(프랑스어 : 네네! 제발… 살살요…!)”


자타공인 한국식 때밀이 베테랑이던

나의 자존심은 와르르 무너지고,

유약한 외국인용 소프트 버전의 때밀이를 받으며,

눈물을 머금고 조용히 나의 패배를 선언하였다.



여신 강림


강력한 때밀이가 끝난 후,

반쯤 넋이 나가,

구석에서 멍하게 앉아 있을 때였다.


입구 쪽이 살짝 소란스럽더니,

모니카 벨루치가 청순 가련미를 먹어버린 듯한

세 명의 아리따운 언니들이 걸어 들어오신다.


그렇다.

내가 사는 곳은 대학가.


이곳은 여대생 언니들의 방과 후 집합소였던 것이었다.

평소엔 긴 팔 헐렁한 티셔츠로 가려져 있던 그 아래에 있던 건,

도저히 숨길 수 없는 모로코 언니들의 ‘압도적 실루엣’이었다.


모니카 벨루치 청순 버전 미모에

이런 어마어마한 몸매라니...


같은 여자인 나도

자꾸만 가는 시선을 애써 돌리며

평정심을 유지하기 바빠졌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자,

아줌마 한 분이 그들에게

‘저기 외국인 있다’는 말을 건넨 듯했다.


언니 중 한 명이 다가오더니,

능숙한 영어로 나에게 이것저것

목욕탕 이용 수칙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If you need any help, let me know"

하면서 웃는 미소가

마치 여신처럼 빛나 보였다.


두근 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아아 언니, 저 완전 팬이 될 것 같아요"

라고 말해버릴 뻔했다.


(물론 실제 나이는 내가 언니, 아니 아줌마다.

하지만 예쁘면 모두 언니지.)



여성들의 삶이 있는 그곳...


문득, 예전에 봤던 만화책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하맘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여성들의 거실’ 같은 공간이었다는 것.


여성의 외출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

이슬람 문화권의 여인들은 하맘에 모여

여자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이어 붙여 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21세기가 된 지금도

하맘은 단순히 몸만 씻고 가는 공간이 아니라,

여인들이 오래된 소통 방식으로

서로의 삶을 이어가는 장소로서 기능하는 것 같았다.


자연스레 서로의 안부를 묻고,

딸들의 중매를 논하고,

누군가의 결혼 소식,

아들의 학교 이야기,

친척의 경조사까지—


그녀들의 인생 이야기들이

따뜻한 증기 사이를 천천히 떠다닌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옷을 벗고,

때를 벗고,

알몸이 되어—

잠시 계급도, 시댁도,

바깥 세상의 규율도 내려놓는다.


그저 ‘여인들끼리’ 이어져온

오래된 공동체로 돌아가는 순간...


누군가의 몫이 모자라면,

옆 사람이 자연스럽게 채워주던 곳.


누구는 바께쓰를 빌려주고,

누구는 Savon Noir를 나눠주며,

누구는 자신의 장판을 기꺼이 내어주는 동안—


영어도, 불어도 통하지 않는 그들 사이에서

이방인인 나조차도


낯선 외국인에서,

한 사람의 여성으로,

공동체의 일원으로,

조용히 받아들여져,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몸의 피로가 풀리고, 마음의 경계도 풀리고


하맘의 바닥은 따뜻했고,

증기는 천천히 흩어졌다.


따뜻한 바닥의 온기를 느끼고 있는데,

왠지 모르게, 한국에서의 생활이 떠올랐다.


겉은 영광스러웠지만, 속은 늘 버거웠던 날들.

누구에게 밑보이지 않기 위해,

트집 잡히지 않기 위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완벽한 나’가 되기 위해

힘들어도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혼자 마음에 갑옷을 두르고 싸워 왔던 날들.


그것을 피해 이국 땅에 왔지만,

홀로 하는 익숙하지 않은 모로코에서의 생활에,

누군가에게 속지 않을까,

잘못 행동해서 위험에 처하지 않을까—

낯선 땅에서의 홀로 지내는 동안에도,

나도 모르게 또 다른 갑옷을 입고 지냈던 것 같다.


겨울 아침의 근육처럼

꽁꽁 뭉쳐있던 마음.


오늘은 왠지

그렇게 굳어 있던 마음이,

부드러운 증기와

아줌마들의 느긋한 수다 소리 사이에서

아주 살짝, 느슨해져 가는 듯했다.


아주머니들은 나에게


"다 혼자 완벽할 필요 없어"

"부족한 건 서로 채워가며 사는 거야"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아까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이곳은 그저 몸을 녹이러 들어온 목욕탕에 불과했다.


하지만, 손끝의 온기와 수증기의 열기 사이에서

묘하게 마음의 벽이 녹아내리며,

물 소리와 웃음 소리에 섞이며,

웅크리고 앉은 나에게,

왠지, 지금은 내가 더 머물고 싶은 곳이 되어 가고 있었다.



〈모로코에서 내가 된 날들〉 시리즈,

다음 이야기는 연말 지난, 새해 첫 화요일 저녁에 찾아뵙겠습니다!


✦각주
Hammam(하맘) — 북아프리카·중동 지역의 전통 목욕탕. 뜨거운 수증기 속에서 몸을 녹이고, 때를 밀고, 수다를 떨며 시간을 나누는 ‘모로코식 치유 공간.

Savon Noir(사본 누아르) — 북아프리카 하맘에서 사용하는 검은 비누. 올리브 오일·올리브 으깬 찌꺼기 등이 들어 있어 각질을 부드럽게 해 때를 불려주는 세정제.


✦ 〈모로코에서 내가 된 날들〉 시리즈

01. 인생을 되찾아준 향기

02. 구글맵으로 갈 수 없는 카페

03. 내 가게를 지켜줘

04. 마라케시에서 몸을 맡기다

05. 도로 위 요지경 — 2026.01.06 19:00(KST) 공개

06. 원하는 곳에 갈 수 없는

07.같이 버틴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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