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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 Jan 28. 2022

네가 무엇으로 자라건


이사를 했더니 사람의 힘을 빌러 새롭게 설치하거나 연결해야 되는 것들이 많다. 오늘만 해도 인터넷 설치 기사님이 오셨고, 정수기 이전 관리 기사님도 오셨고 식기 세척기도 전문 기사님이 오셔서 뚝딱 새로운 자리를 잡아 주셨다. 나는 따뜻한 집안에서 그분들의 방문을 받는다. 물론 얼마 간의 설치 비용을 내야 하지만 아마 대부분은 회사에 납입되는 것이겠지.


나는 꼭 기사님들께 목을 축일 음료를 내어 드리고, 코로나 상황으로 집에서 마스크를 벗을 수 없다 하시면 커피를 끓여 종이컵에 내어 드린다. 돌아가시는 길에는 문 앞까지 가서 아이와 함께 공손히 인사를 한다. 내 집에 온 손님들을 대접하고 감사하는 마음에 더하여 내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나의 욕망에서 비롯된 습관이다.


내가 집집마다 초인종을 누르고, 아이들을 방문하던 그때. 학습지 ‘교사’로 일하며 때로는 나 스스로가 선생님이 아닌 빚쟁이이거나 잠시 들리는 외판원 같이 여겨지기도 했다. 얼굴에 마스크 팩을 한 채 “가세요!” 고개를 까딱하던 그 학부모와의 ‘그날’은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내가 가르쳤던 그 댁의 5학년 아이는 어학원의 학원 숙제를 하느라 바빠 엎드린 채 내가 나갈 때 내다보지도 않았다.


가난한 아현동을 돌아다닐 때 오히려 나는 마음이 많이 편안했고 참 따스해졌다. 그 지역을 가는 것이 기다려졌다. 학원을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은 나만 기다렸고, 어른들은 호랑이 이불이 펼쳐진 따뜻한 아랫목을 나에게 내어줬다. 한글이나 한자가 빼곡하게 쓰여 있던 앉은뱅이 공부상에 앉아 당신들이 드시던 구운 떡, 잘 내어 놓지 않을 것 같은 꽃무늬 커피 잔에 담긴 믹스 커피 등을 마셨다.

때로는 물이 너무 많아 싱겁거나, 잘 녹지 않은 커피 가루가 둥둥 떠 있었지만 그래도 그 커피 한 모금은 하루에 스무 여 집을 도느라 지친 내 발바닥까지 따뜻하게 데워줬다.


신기한 것은 말이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 집의 분위기, 학부모님의 선생님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아이의 공부 태도는 무언가 무서우리만치 꼭 닮아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느낌을 수년간에 걸쳐 가슴 깊숙이 인지했고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 아이가 공짜로 타인을 존중하는 아이로 자라지 않는다. 우리 아이가 공짜로 어른을 공경하는 아이로 자라지 않는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아이들은 내내 관찰하고 있으며 우리 아이는 나를 꼭 닮은 아이로 자라는 것이다. 


집을 정리하는데 커피 여과지가 뭉터기로 나왔다. 쓸데없는 소비를 했던 것을 반성하며 버리는 것이 아까워 동네 카페에 나눔 글을 올려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가까운 동에 사는 주민분께서 받으러 오셨다. 여과지를 드리는 길에 집에 있던 둘째가 뛰어나가 90도로 무릎 굽히며 복도가 떠나가라 인사한다. 몇 주 전인가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었는데 그때 배달 기사님께도 어찌나 큰 소리로 쩌렁쩌렁 인사하는지, 기사님 얼굴이 미소로 밝아지는 것을 보니 나도 참 마음이 환해졌었다. 아이가 너무 사랑스럽고 잘 크고 있는 것이 감사해 갈비뼈가 으스러지게(?) 안아줬었다.


우리 집을 다녀가시는 분들의 마음이 훈훈해지면 좋겠다. 오늘 하루가 참 피곤하고 소란스럽더라도, 그래도 우리 집에 잠깐 머문 시간이 그분들의 피로를 슬금 덜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게 결국 내 복으로, 우리 아이의 복으로 돌아온다. 사실은 무서운 나의 ‘플랜’이다.






엄마, 아기가 예뻐서 죽을 거 같아.

자고 있을 때도 자꾸자꾸 보고 싶어.


동생을 깨우고 싶은 장난스러운

너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나는

그런 말을 하는 네가

예뻐서 죽을 거 같은데


내 사랑이 네 사랑에 못 미치는 것이

벅차서,


내게 남은 사랑이

곱절이 되어 네게 흐르고

너는 네가 받은 사랑을

또 곱절로 세상에 흘려보내겠지


그렇게

세상이 별빛으로 꽃으로

언젠가

가득 차는 상상을 하면


그래 그거면 됐다


네가 무엇으로 자라건

그거면 됐다


- 2022. 2 <네가 무엇으로 자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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