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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편 vs 아빠 편

아빠는 왕따

by 이지은

우리 집에는 왕따가 하나 있으니 바로 "아빠" 다.

아빠도 안다.

본인이 왕따라는 사실을.


종종 반주로 소주 한잔을 하실 때면 다 들리는 큰소리로

"우리 집에는 내 편이 없어~~!!"

라고 혼잣말을 하셨다.


엄마가 남동생을 편애했다면 아빠는 나를 편애했다.

엄마는 남동생이 85점을 맞아오면 "똘똘한 아이니 조금만 더 노력하면 좋을 텐데.." 하셨고

내가 85점을 맞아오면 도끼눈을 하고 "정신을 어디다 뒀길래 이런 쉬운 문제를 틀려와!" 하셨다.

아빠는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하면 "지은이 말이니 맞을 거다" 하셨고

남동생은.. 뭔 말도 못 하게 했다.


이러면 사실 내가 아빠 편이 돼줘야 하는데 난 그러지 못했다.

외국의 아주 더운 나라에서 공사현장 관리를 하셨던 아빠는 일 년에 단 두 번 휴가 때만 집에 오셨다.

일 년 중에 집에 계신 날이 두 달도 채 안되었다.

IMF 때 명예퇴직을 하시고 집에 계시게 됐을 때도 나는 아빠가 좋기도 했지만 그 보다 어색한 마음이 더 컸다.

게다가 어린 나에게는 온 세상이 엄마였고 엄마 말이 다 맞는 거고 그저 엄마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던 것이다.


엄마가 "술좀 작작 마셔! 에휴.." 하면

나도 뒤에서 "아빠 술 좀 그만 마셔. 술이 그렇게 맛있어?" 했다.


엄마가 "여보! 실없는 농담 좀 그만해" 하면

나도 "아빠 노잼~" 했다.


엄마를 한숨 쉬게 하는 아빠가 참 답답해 보였다.

나도 엄마를 따라서 같이 아빠를 미워했던 것 같다.

가끔 아빠는 난동을 부리는 것으로 화를 표출했고 그럴수록 왕따의 입지는 굳어져 갔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어른이 된 내가 친정에서 밥을 먹으면서 보니

여전히 한숨 쉬는 엄마와 여전히 아재 개그를 날리는 외톨이 아빠의 모습이 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의 "에휴~" 하는 한숨이 꼭 누군가를 향한 것은 아니구나.

힙합가수가 마지막에 "에이요~" 하듯 오히려 어떤 추임새에 가까운 거구나.

아빠의 아재 개그에도 나름의 웃음 포인트가 있었던 거구나.

심지어 나에게도 그 아재 개그의 피가 흐르고 있구나.


얼큰한 매운탕에 반주 한잔 걸치는 게 뭐 그리 대수였을까.

아빠의 아재 개그에 왜 한번 웃어주지를 못했을까.


내가 어린 마음에 엄마 아빠의 모습을 너무 크고 심각하게 받아들였구나..

이제야 아빠가 참 외로웠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절 출장에서 돌아온 아빠가 돌돌 말린 대빵 큰 알라딘 양탄자를 풀어놓으면 그 안에서 속이 새빨간 오렌지며 초콜릿이며 대추야자며 피스타치오 같은 것들이 쏟아져 나오던 기억이 난다.

그럼 나랑 동생은 오랜만에 돌아온 아빠는 뒷전이고 그 달콤한 선물들이 좋아서 난리가 나곤 했다.

그때 우릴 바라보던 아빠 표정은 어땠을까?

아빠는 무슨 마음으로 그 무거운 것을 중동에서부터 집까지 들고 오셨을까?


아빠가 잘해줘도 서먹하게 대했던 적이 많았는데

가끔은 아빠 편도 들어주고 애교도 좀 부려볼걸 그랬다.


이제는 그때 그 맛의 오렌지와 대추야자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듯이

아빠도 언제까지나 지금 이 모습으로 있어주지 않을 테니까..



이지은의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written_by_leeji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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