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 없는 경비 예산으로 누려보는 작은 권력
소속 부서 같은 파트원인 신입사원 청유(淸流)님과 함께 저희 사업부 간식 담당이 되었습니다. 본업과 더불어 부서 경비 담당이었던 과거 경력을 살려볼 수 있겠습니다. 주로 막내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권한을 어쩌다 다시 얻었습니다.
안 하던 일이 주어지면 글 소재가 되기 때문에 때론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물론 아닐 때가 더 많지만요.) 장시간 같은 일을 하다 보면 떨어지는 집중력을 혈당으로 끌어올리는 게 바로 간식의 힘인 듯합니다. 한정적인 예산으로 한 달 동안 빈 곳간을 채우는 사무실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오늘 점심 뭐 드실래요(1): 사회초년생 편, 오늘 커피 뭐 드실래요(2) 평일 편, 오늘 저녁 뭐 드실래요(3) 회식 편에 이어 먹는 김에 살아보는 에피소드입니다. 나름 애정이 담긴 시리즈인데 이번이 4편째여서 분발할 필요가 있으니 이것저것 맛보고 또 돌아오겠습니다.
청유님의 간식 배분전략은 입맛 소통형 민주주의입니다. 자주 주문해 왔던 국민 간식으로 불리는 대중성이 있는 과자와 소시지, 라면을 경비(복리후생비) 예산 사용의 우선순위로 둡니다. 예를 들어, 오리온의 촉촉한 초코칩과 삼양식품의 불닭볶음면이 있겠습니다.
반면에 늘여름, 저의 배분전략은 단맛 독재형 집권주의입니다. 특히 청우식품의 사과 파이, 닥터유의 단백질 초콜릿바와 같이 혈당을 빠르게 올리는 진한 달콤한 맛의 한입거리를 우선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청유님은 공용 캐비닛이 조금이라도 비어있으면 신속하게 채워놓습니다. 바로 옆 창고 캐비닛에서 수요에 따라 재고 물량도 조절하여 매일 빠짐없이 공급합니다. 어떤 업무를 맡기더라도 설령 작은 일일지라도 소홀히 여기는 법이 없습니다.
과자를 미리 서랍에 짱 박아두는 추운 겨울 대비 저장형도 있고, 밥 대신 과자만 먹는 스낵 기반 생존형, 건강상 식습관 관리나 다이어트를 위해 간식 절제형도 있으며, (서랍 깊숙하게 숨겨둔 첵스초코 한 박스와 같이) 본인 취향에 맞는 간식을 별도로 구비하는 커스터마이징 자급자족형도 있습니다.
한 공간에 있더라도 사람이 이렇듯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목격하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곳간의 디폴트는 비어있는 상태라고 보고 1주에 1회 가득 채워두고 떨어질 때까지 내버려 두는 편입니다. 그렇다 보니 베짱이가 되어 청유님이 앤트맨처럼 부지런히 열일하고 계십니다.
꽤나 대충 인간인 저에게 간식 운영·관리조차 성실한 청유님은 눈부시게 빛나보이는 한편 불 꺼진 후 드리우는 그림자에 마음이 쓰입니다. 일이라는 존재는 (중)독성이 있어서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볼 때까지 멈추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일중독은 저녁과 주말을 가져가는 무서운 현상입니다.)
긴급하게 치고 들어오는 돌발 이슈에 한두 시간 안에 보고자료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점심도 스킵하고 회피하지 않고 책임지는 청유님의 모습이 차마 눈에 밟혀 옆에 앉았습니다. 도와드리면서 사이렌 오더로 아이스티와 쿠키를 시키고 픽업해왔습니다.
먹을 여유도 없었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어떤 음식은 응원이고 또 다른 날은 위로로 쓰이더군요. 적어도 제가 받은 만큼은 꼭 돌려드리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나 안 될까 봐 긴장해서 떨리다 못해 저려오는 팔이 책임의 무게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저는 청유님의 그 마음가짐이 분명히 어느 날 스스로를 다치지 않게 구하러 오리라고 믿습니다. 좋은 태도는 돈 주고도 못 사니까요, 그게 가능했다면 모든 회사에는 게으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을 겁니다.
감정의 균형을 맞추는 간식으로, 정해진 예산 안에서 정해지지 않은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간식이라는 매개로 여러분도 '일하는 나'를 잠시 들여다보는 건 어떠신가요? 과자가 아니라도 좋으니 어떤 것을 통해서라도 여러분이 지금 계신 곳에서 기쁜 일에는 활짝 웃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고민이 있으신가요? 주위의 간식을 드셔보세요. 이 과자가 휴식일지 일탈일지는 여러분 하기 나름이지요. 무엇을 고르시겠습니까?
[히로시마 레이코 작가님, 『이상한 과자가게 전천당』(하늘이 내려준 동전을 받는 가게) 차용]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그의 눈빛이었다. 그는 늘 나를 세상 쓸모없고 성가신 사람 보듯 바라봤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눈빛들은 차곡차곡 내 눈 안으로도 들어와서 언젠가부터 나도 나를 그렇게 바로보기 시작했다.
유난히 마음이 너덜해진 날에는 어떤 의식처럼 J의 사골국을 꺼내 데워먹으면서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곱씹었다. 나는 지금도 그게 '진짜 미친 사리곰탕면' 덕이라고 생각한다. 결코 내 것일 수 없다고 여겼던, 내가 소중하다는 감각과 나를 다시 이어준 한 끼의 식사. 어떤 음식은 기도다.
- 김겨울 외 11인 X 배달의 민족 뉴스레터 <주간 배짱이> 팀, 요즘 사는 맛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