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시의 겨울이 생경했던 이유는 하절기와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분위기 때문이다.
이곳의 봄과 여름을 설명하자면 단순히 날씨가 좋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찬란하다, 눈부시다, 뛰어나다, 밝다, 아름답다,온갖 종류의 수식어를 갖다붙여도 무방하다.
그때의 도시는 온통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덮인다. 해는 늦도록 지지 않으며 건조한 기후 탓에 뜨거운 볕을 피하기만 하면 선선하다. 동네 어귀 마다 크고 작은 축제가 열리고 노천 상점이 좌판을 깔면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오로지 날씨만으로 기분이 좋은 날들이 이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서늘한 바람이 밀려들어와 붉게 물든 나뭇잎을 하나둘 떨어뜨리면 대기를 가득 채우던 활기와 설렘은 사그라든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집 안으로 꽁꽁 숨어버리고 텅 빈 거리 위에는 빗줄기가 떨어진다. 말하자면 비는,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겨울 동안은 종일 비만 내린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날은 거의 없지만 습기 때문인지 몹시 춥게 느껴진다. 해가 지는 시간은 점차 앞당겨져서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오후 세시만 돼도 사방이 깜깜해진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거나 장대같이 쏟아지기도 했고 잠깐 멈췄다가 다시 내리기를 반복한다. 비가 단 한차례도 내리지 않는 날은 손가락에 꼽을 만큼인데 그런 날조차도 하늘은 짙은 회색빛 구름으로 덮여있다. 해를 볼 수 없는 날이 몇 달 동안 이어지면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어깨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우울의 그림자가 내려앉는다.
이 우울의 계절에도 내가 사랑하는 것이 한 가지는 있다. 우중 산책이다.
나는 바깥에서만 배변을 하는 개들 때문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 두 번 무조건 산책을 나가야만 했다.
여름 동안 늦은 시각까지 인파로 북적이던 동네 공원은 비가 내리면 인적이 사라지고 고요해진다. 인간이 자취를 감춘 너른 잔디밭은 어디선가 무리를 지어 날아온 청둥오리와 기러기 떼의 차지가 된다. 잔디 위 점점이 내려앉은 수많은 새들은 멀리서 보면 꼭 바다 위 솟아 있는 작은 섬들의 군락 같았다. 내 개들은 거대한 날개를 펼친 채 맹렬하게 공격하는 기러기에게 몇 번 혼쭐이 난 뒤로는 그들을 보아도 뒤쫓거나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새 무리 사이를 지날 때면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침묵한 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새들은 잠깐 동안은 경계 태세로 고개를 쳐들었다가 이내 관심을 거두고 깃털을 고르거나 잔디를 헤집는 등, 본래 하던 일로 돌아갔다. 두 마리의 개는 목줄을 풀어 주면 눈치껏 새들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나무 둥치의 냄새를 맡고 물 웅덩이 속을 참방 거리고 젖은 낙엽 위에 누워 등을 비볐다.
이처럼 암묵적 평화 협정이 이루어지면 나는 개와 새, 두 무리 중간 어디쯤에 서서 빗소리를 들었다. 방수 점퍼를 걸친 어깨와 장화를 신은 발등 위로 빗방울이 떨어질 때면 꼭 벽난로 속 장작이 타는 것처럼 타닥타닥하는 소리가 났다. 낙엽과 나뭇가지 위로 쏟아지는 빗줄기는 후드득후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한참 동안 빗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기분이 몽롱해졌다. 어떤 결계 같은 것이 나를 감싸는 것 같았고 뺨에 닿는 빗방울처럼 차가운 현실 세계와는 완전히 분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의 나는 불안하지 않았고 슬프거나 외롭지도 않았다.
나는 이 상태가 명상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지점에 닿았을 때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당시로서는 명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심신에 작용하는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현실 세계로 귀환시키는 것은 온몸을 급습하는 추위였다. 방수 점퍼 사이로 스며드는 냉기는 무척이나 실재적이어서 어느 순간 몸이 부르르 떨리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젖은 얼굴에 닿는 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전혀 다른 차원 안에 머물다가 원래의 세계로 빠져나온 듯했다. 돌아온 현실 세계가 되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 두 다리가 허공에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비정한 세계로 입성하기 위해, 나는 의식을 흔들어 깨우고 현실의 바닥에 두 발을 굳건히 붙였다. 잠시 누그러들었던 감각들은 팽팽히 곤두섰고 일사불란하게 전투 자세를 갖췄다. 피로감인지 서글픔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고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흠뻑 젖은 채 벌벌 떨며 걸음을 재촉하다보면 방금의 꿈같은 순간은 금방 잊어버리곤 했다. 잠시나마 비현실적이던 현실은 정확히 현실같았고 정서적 전투자세 또한 지극히 익숙한 일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매일 빗속을 걷다 보면 우울의 계절도 결국 끝자락에 접어든다. 낮의 길이가 길어지고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이 점점 늘어난다. 잔디밭을 점령했던 새들은 어딘가로 날아가 자취를 감춘다. 빗속 산책과 당분간은 작별이다. 그다지 아쉽지는 않다. 나는 봄을 사랑하고 내 개들은 맑은 날 따뜻한 햇볕 아래 걷기를 더 선호한다. 그리고 겨울은 어김없이 다시 돌아올 것이다. 빗줄기와 어딘가로 떠났던 새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