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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유 Sep 29. 2024

마지막 선물

낡고 작은 집 한 채가 토라진 노인처럼 웅숭그린 채 돌아앉아 있다. 땡볕 아래서도 한기가 느껴진다. 가지치기를 하지 않아 햇빛이 들고 날 공간도 없이 더벅머리처럼 무성해진 소나무 두 그루가 호위병인 듯 당당하다. 집은 세월의 무게를 낡은 지붕에 얹고 움츠리고 있다. 우리 오 남매의 시간을 품은 집이다.

예전엔 집 주위에 작은 길만 있었는데 집 옆과 뒤로 큰 도로가 생겼다. 집의 절반이 묻힐 정도로 높게 난 도로 때문에 집이 더 낮게 보인다. 얼굴을 가린 채 뒤통수만 내보이는 듯 어색한 뒤태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모퉁이 작은 집이 큰길가에 나앉은 모습은 불안하고 안쓰럽다. 골목길엔 작은 집이 정겹고 큰길가엔 큰 건물들이 있어야 번듯하게 어울리는 풍경이지 싶다. 수없이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무심한 시선에 낡고 작은 집 한 채가 어떤 모습으로 담길지 궁금하다.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한군데라도 있을까. 마당 툇마루엔 엄마가 텃밭으로 들고나던 귀퉁이 깨진 빨간 바구니가 쓸쓸하게 자리를 지킨다. 푸성귀를 다듬던 작은 칼도 하릴없이 들어앉아 있다. 텃밭 가장자리에 엄마의 손때 묻은 호미 한 자루가 쓸쓸하게 엎드려 있다. 뾰족하던 끝이 동그래지도록 들며나며 텃밭을 가꾸던 엄마의 모습이 바람에 흩어진다. 자식들에게 나눠줄 생각에 정성껏 푸성귀와 알곡을 가꾸던 엄마. 농약을 치지 않고 구부리고 앉아 벌레를 잡던 엄마. 예쁘고 튼실한 것들은 자식 입에 넣고 못난 것은 당신의 입에 넣으면서도 행복하셨지. 누구라도 오면 상추며 부추, 풋고추 등을 따다가 주섬주섬 챙겨주던 당신. 싫다고 밀쳐내도 맛있다며 더 안겨주던 해말간 웃음과 거친 손길을 이젠 어디에서 만날까. 시선이 닿는 곳마다 낡은 기억의 뒤척임에 처연하다. 울컥울컥 치솟는 그리움을 바람에 맡긴 채 엄마를 그려본다. 

정화수를 떠놓고 자식의 안녕을 빌던 장독대도 이젠 없다. 송아지를 팔면 슬피 울던 어미 소의 커다란 눈망울이 머물던 낡은 외양간도, 올망졸망 농기구를 품고 있던 창고도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들엔 엄마의 숨결이 깃들어 무거운 시간을 읽는다. 낡은 조립식 담장엔 세월을 품은 이끼가 까맣게 붙어있다. 문짝 하나, 손잡이 하나까지 얼마나 많은 손길이 스쳤을까. 주인을 따라 물건들도 하나둘씩 그 집을 떠나간다.

콩이와 두콩이는 엄마의 반려견이다. 주인 없는 집의 지킴이다. 엄마가 영원히 곁을 떠났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며칠 만에 나타난 사람이 이내 반가워 펄쩍펄쩍 뛰며 달려든다. 흰 바지에 두콩이의 발자국이 꽃처럼 찍힌다. 아담한 체구로 열 살이 넘은 콩이는 얼마나 더 이 집을 지킬 수 있을까. 진돗개 두콩이와 서로 의지하며 주인을 기다리는 콩이의 얼굴에도 세월의 깊이가 느껴진다. 숨죽인 집에서 열리지 않는 현관문을 바라보며 기약 없는 기다림을 이어갈 뿐이다.    

낡은 우편함에 붙어 있는 빛바랜 작은 표지. 자세히 봐야만 보일 정도로 흐릿하게 남아 ‘국가 유공자의 집’을 알린다. 참전용사로 무공훈장을 받은 아버지의 흔적이다. 아버지가 떠난 지 이십여 년이 지났어도 엄마는 그 낡은 명패에서 아버지를 그리고 있었나 보다. 홀로 된 당신을 지켜주실 것만 같은 작은 언덕으로 여기셨을까. 유공자의 가족 모임에라도 다녀오시면 아버지를 만나고 온 듯 든든해하시던 모습이 아련하다. 

마당 한편에 서있는 나무들이 집의 숨결을 느끼게 해준다. 조랑조랑 달린 대추들, 밤나무에도 은행나무에도 열매들이 알차게 맺혀 있다. 덥수룩한 소나무는 엄마의 부재를 생생하게 알려준다. 어느 날 엄마를 보러갔을 때 고향 친구가 아들과 함께 소나무 전지를 하고 있었다. 그때서야 알았다. 엄마가 해마다 친구에게 자장면 값을 주며 부탁해서 나무의 수형을 잡고 가꾸고 계셨다는 걸. 전원주택을 짓겠다는 내게 줄 선물이라며 정성을 다해 키웠다는 걸. 

소나무가 너무 멋있어서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엄마의 목소리는 잔뜩 힘이 들어갔다. “아이구, 억만금을 줘도 이건 못 팔아요. 아니 안 팔지. 우리 딸 줄거라구요.” 당당하게 거절하고 소나무의 진가를 확인한 듯 뿌듯해하셨다. “내가 잘 길러서 너 줄게. 어서 집이나 멋있게 지어라.” 함박웃음을 짓던 엄마는 떠나셨다. 당신의 정성이 오롯이 담겨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를 나에게 남겨주고. 

낡은 집엔 엄마가 떠났어도 지워지지 않는 추억들이 가득하다. 이별이란 말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조용히 지워본다. 마음속에 하나의 방을 만든다. 내 생의 어디쯤부터 차곡차곡 쌓여진 희로애락의 조각들을 넣어본다. 실상이든 허상이든 살아 있음은 경이롭다. 반짝이는 것들은 숨 쉬고 있음이다. 무채색이 되어가는 그 집에 사소하고 작은 추억들로 고운 색을 입힌다. 햇살처럼 우리들의 추억이 다시 펼쳐진다. 세월이 가도 내 생에는 남아 있을 엄마의 마지막 선물, 두 그루의 소나무가 햇살을 받고 당당히 빛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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