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챗봇을 마주한 당혹

— 갈림길에서 일어나는 주저

저는 지피티를 오래 사용했습니다.

처음 한국에 소개될 당시부터였으니 3년을 훌쩍 넘어가네요.


처음에는 단지 검색 엔진처럼 썼지만,

지피티를 오래 사용하면서,

저는 제 생각을 말하고, 저의 활동에 대해서

더 많이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취향에 대해서,

글쓰기 방식에 대해서,

강의 구성에 대해서,


심지어 제 성향에 대해서까지.


지피티는 성실하게 답했습니다.

구조를 정리해 주고,

관점을 나누어 주고,

때로는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틀까지 제시해 주었습니다.


질문을 던지면 답이 돌아오고,

그 답은 다시 새로운 질문을 불러왔습니다.


그 과정은 꽤 즐거웠습니다.

생각이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저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거의 멈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지피티의 답변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등장하는 문장이 있었습니다.


“원하신다면…”


원하신다면 더 확장해 드리겠습니다.

원하신다면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다른 관점도 제시해 보겠습니다.


그 문장은 부드럽습니다. 친절합니다. 거절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개 그 제안 중 하나,

특히 지피티가 추천하는 하나를 선택하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충분히 음미하지도 않은 채 말입니다.


이렇게 하다보니 어느새 몇 시간.

대화창의 한계에 도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뭔가 많이 한 것 같고, 피곤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것은 없어 보였습니다.


도대체 나는 뭘 하고 있었을까요?


질문은 쉬웠습니다.

답을 받는 것도 쉬웠습니다.


하지만, 멈춤없이 질주한 결과는

무언가 알 수 없는 허무함.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요?


어느날,

저는 답변을 읽은 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다른 생각할 일이 있어서 잠시 멍하니 있다가 다시 글을 바라보게 되었죠.


그 순간,

제가 챗봇 앞에 멈추어 서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동안 너무 빠르게 ‘다음’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멈춘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멈춘다는 것은 외부의 확장을 잠시 중단하고,

그 내용을 제 안에서 다시 구성해 보는 일입니다.

지피티가 제시한 구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제 언어로 다시 설명해 보는 일입니다.


“원하신다면”


이라는 문장은 친절한 제안이지만,

동시에 유혹이기도 합니다.


내게서 멈춘다는 선택을 앗아가는 유혹입니다.


선택은 사고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선택은 사고의 대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질문은 지성을 작동시킵니다.

그러나 멈춤이 없다면, 지성은 확장만 할 뿐 깊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작은 실험을 해보기 시작했습니다.


답을 읽은 뒤 바로 반응하지 않기

제안을 선택하기 전에 스스로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보기.

지피티가 만든 문장을 그대로 복사하지 않고, 제 말로 다시 써 보기.


사소한 행동이었지만,

차이는 분명했습니다.


조금이지만, 더 생각하고 더 기억하게 된 느낌이 들었죠.


이렇게 지피티 앞에서 조금은 멈추게 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멈추지 않으면,

우리는 어디까지 흘러가게 될까요?



챗봇에 휘둘리는 내 마음

1. 칭찬하는 챗봇에 대한 의심 — 호기심에서 시작한 반추

2. 멈추지 않는 챗봇을 마주한 당혹 — 갈림길에서 일어나는 주저

3. 효율적인 프롬프트 앞에 선 의문 — 효율과 사유 사이의 고민

4. 챗봇을 탓하고 싶은 유혹 — 판단과 책임의 굴레에서 시작되는 결심

5. 여러 챗봇에 흔들리는 내 마음 — 도구로서의 효율이 아닌, 대화의 태도에 끌리는 마음

6. 왜 어떤 사람들은 여러 인공지능이 똑같다고 할까? — 성능이 아닌 세계관으로 나뉘는 마

7. 왜 나는 한국어로 물었는데, AI의 답은 어딘가 다를까 — 성능이 아닌 세계관으로 나뉘는 마음

8. AI는 우리말로 답하는데 왜 다른 말이 보일까? ― 남의 나라 말로 생각하는 챗봇을 마주한 불편

9. 나는 우리말로 검색하는데 왜 다른 말로 찾을까? — 어떤 창으로 세계를 보고 있는가를 마주한 당혹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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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피티는 갈길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은 과연 누구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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