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능이 아닌 세계관으로 나뉘는 마음
앞서 저는 태도로서 인공지능을 나누어 바라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기사에서 흔히 나오는 성능이 아니라,
나에게 어떤 형태로 대답하는가라는 태도 때문에 여러 챗봇 사이에 고민 중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챗봇은 계속 사용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성능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도 나와 맞는가 아닌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최근 '인공지능이 발달할수록 모두 같아진다.'라는 주장을 보았습니다.
당연히 성능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대답 자체가 완전히 같아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제 고민은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성능도 태도도 같다면, 결국 무엇을 선택하건 상관없으니까요.
그래서 그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주장의 상당 수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떤 질문을 던졌을때 나오는 답변이 모두 같다.'
물론, 계산이나 그런 것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어느 정도 의미있는, 논술 시험에 나올 것 같은 내용들,
가령, 어떤 철학적 명제를 제시했을때 비슷한 답변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습니다.
철학적 명제는 수천 년에 걸쳐 축적된 정보입니다.
이미 어느 정도 정리된 사실에 대해서라면 어떤 챗봇이든 비슷한 대답을 내놓게 됩니다.
과거 시험처럼, 누군가가 바라는 답에 맞추어 똑같은 철학적 명제를 내놓을 것입니다.
인공지능을, 챗봇을 검색엔진처럼 사용한다면,
지피티도 클로드도 제미나이도 그록도 거의 같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능이 향상될수록 검색 결과는 더욱 비슷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검색하는 정보가 늘어나면서 서로 겹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인공지능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일부 주장과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그 차이는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왜 같은 인공지능에 대해서 각기 다른 느낌을 받는 걸까요?
그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인공지능의 차이는 검색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정답이 없는 질문에 대한 판단을 통해서 느낄 수 있습니다.
- 모호한 상황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 사용자의 전제에 동의하지 않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 복잡한 문제를 어떤 순서로 전개하는가.
- 불확실한 것을 불확실하다고 얼마나 명확히 말하는가.
- 비판적 입장을 어느 강도로 표현하는가.
이러한 질문에서 챗봇들의 차이는 벌어집니다.
클로드와 지피티만으로도 엄청난 차이가 느껴집니다.
클로드와 그록은 거의 정반대입니다.
왜 그럴까요?
성능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만든 사람들이
어떤 기준으로, 어떤 방향으로 만들었는가.
개발자의 세계관이 챗봇의 태도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어떤 개발자들은 인공지능을
가능한 한 자유로운 도구로 만들려 합니다.
어떤 개발자들은 인공지능이
책임 있는 방향으로 작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록도 클로드도 보편적 윤리를 신경쓸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얼마나 신경쓰는가에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사용자도 자신의 취향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뉩니다.
처음에는 성능을 보고 선택하지만,
사용하면서 점차 자신의 방향과 맞는 챗봇을 더 찾게 됩니다.
어느 순간 내가 좋아하는 인공지능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사용하면서 점차 그런 방향을 더 원하게 되면서, 그런 성향이 강해집니다.
페이스북처럼, 수많은 사용자가 누른 '좋아요'가 성향을 더욱 강화하는 것입니다.
논쟁을 좋아하는 사용자라면 그록을 사용하며 활발한 논쟁에 좋아요를 누르고,
엄격한 비판을 좋아한다면 클로드에서 비판적 태도에 좋아요를 누르겠지요.
그 결과 성능이 발달할수록, 사용자가 늘어날수록,
챗봇의 태도는 더욱더 달라집니다.
- 내가 챗봇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 내가 챗봇에 어떤 질문을 하는가?
이에 따라서 챗봇은 달라집니다.
앞서 말했듯 마법의 거울처럼 우리에게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매우 간단한 사례가 있습니다.
저는 제 일상의 흐름을 챗봇에 기록하고 평가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잘 때까지, 오늘의 목표도 함께 기록하며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저는 일상을 스마트폰 메모장에 일단 적어두었다가 한번에 챗봇에 옮기는데,
완전히 같은 내용임에도 챗봇마다 답변이 완전히 다릅니다.
정답이 없는 일상에 대한 평가이기 때문에, 그 태도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일찍이 트위터에서 카톡처럼 가볍게 쓰는
'재미로 챗GPT'
는 전기와 물 같은 자원을 낭비하니 피하면 좋겠다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재미로 지피티' 좋습니다.
그것이 나의 삶을 즐겁고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면.
인공지능에는 얼마든지 용도가 있습니다.
'내가 좋아할 만한 애니메이션을 알려달라'거나
'세계 평화를 지키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둘의 위상이 다르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이라는 도구의 '쓸모'라는 것은,
그리고 사람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는
사람마다, 그리고 그때마다 달라집니다.
제가 끌린 것은 성능이 아니라 태도였고,
그 태도를 선택한 것은 결국 저였습니다.
챗봇을 선택한다는 것은
단순히 도구를 고르는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떤 태도로 생각하고 싶은가.
어떤 방식으로 사유를 확장하고 싶은가.
그 선택이 나의 세계관과 만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는 어떤 세계관으로 존재하고 있을까요?
인공지능 시대에 더욱 중요한 인간의 마음과 세계관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문화와 사회, 창작 작품에 담긴 마음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그 세계관을 통해 태도와 지성을 생각합니다.
이 마음에 흥미를 느끼는 분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챗봇에 휘둘리는 내 마음
1. 칭찬하는 챗봇에 대한 의심 — 호기심에서 시작한 반추
2. 멈추지 않는 챗봇을 마주한 당혹 — 갈림길에서 일어나는 주저
3. 효율적인 프롬프트 앞에 선 의문 — 효율과 사유 사이의 고민
4. 챗봇을 탓하고 싶은 유혹 — 판단과 책임의 굴레에서 시작되는 결심
5. 여러 챗봇에 흔들리는 내 마음 — 도구로서의 효율이 아닌, 대화의 태도에 끌리는 마음
6. 왜 어떤 사람들은 여러 인공지능이 똑같다고 할까? — 성능이 아닌 세계관으로 나뉘는 마음
7. 왜 나는 한국어로 물었는데, AI의 답은 어딘가 다를까 — 성능이 아닌 세계관으로 나뉘는 마음
8. AI는 우리말로 답하는데 왜 다른 말이 보일까? ― 남의 나라 말로 생각하는 챗봇을 마주한 불편
9. 나는 우리말로 검색하는데 왜 다른 말로 찾을까? — 어떤 창으로 세계를 보고 있는가를 마주한 당혹감
[ 모든 거울은 같은 답을 내놓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이 똑같이 느껴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