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의 나라 말로 생각하는 챗봇을 마주한 불편
최근 딥시크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가지 걱정도 있었지만 상당히 재미있는 인공지능이다군요. 이것저것 갖고 놀기에 좋습니다.
"딥시크를 써보고 있어요. 괜찮더군요."
아는 분께 이런 이야기를 하자, 그 분도 약간 관심을 보입니다. 하지만, 이내 이런 말을 합니다.
"딥시크? 중국 거잖아요? 개인 보안이 걱정되지 않나요?"
맞습니다. 많은 분이 딥시크에 대해서 개인정보나 데이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같은 것을 걱정합니다. 저도 조금은 그렇죠.
하지만, 제가 가장 걱정하는건 검열입니다. 개인 도서관을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표현의 자유, 생각의 자유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딥시크는 중국 정부의 검열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 내 생각을 멋대로 해석하고 왜곡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어떤 검열을 하는가? 라고 말이죠.
"저는 표현 자체를 차단합니다."
딥시크는 하나의 기준에 따라 판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윤리와 판단의 기준이 단일하게 설정되어 있고, 그 기준에 맞추어 답변이 구성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특정한 하나의 시선으로 세계를 해석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나는 검열 받고 있다.'라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역시 인간과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금 흥미가 생겼습니다. 바로 그 '딥시크 만의 기준'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죠.
그래서 딥시크를 좀 더 써보기로 했습니다. 일단 사용하고보니 딥시크에는 재미있는 점이 있었습니다.
딥시크는 답을 주기 전에 그 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내가 어떤 질문을 했는지, 그 질문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답을 구성하려 하는지. 그 일련의 흐름이 드러났습니다.
'이 사람은 이런 의도로 물었구나.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답을 구성하는 것이 적절하겠군.'
그런 식의 판단 과정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답변이 아니라, 하나의 사고 과정을 마주하는 경험에 가까웠습니다. 물론, 딥시크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체인 오브 소트(Chain of Thought, 생각의 사슬)'이라는 이 시스템은 딥시크의 추론 과정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한 것에 가깝죠. 이를 통해 신뢰를 높이고, 학습 효과를 주면서, 문제를 찾기 쉬워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식으로 이해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어떤 답이 만들어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유를 확장하는 도구로서의 가능성도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상한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분명 한국어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중국어로 나타났습니다. 그 순간 잠시 멈칫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어서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위치에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한국어로 묻고, 중국어로 생각하는 흐름. 그 장면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아, 이 인공지능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구나. 그리고 이 인공지능은 한국어로 답을 하고 있지만, 한국어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 과정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인공지능 역시, 자신이 만들어진 환경을 기준으로 세계를 탐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어로 질문하는 것은 겉에 드러난 형태일 뿐이고, 실제로는 다른 언어와 다른 자료를 중심으로 사고가 이루어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이러한 차이는 특정 주제를 이야기할 때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저는 무협이라는 장르에 대해 여러 인공지능을 통해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인공지능은 무협에 대해 기본적인 정보는 제공하지만, 그 개념의 깊이나 맥락에 대해서는 표면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기, 내공, 무공 같은 개념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 체계 속에서 작동하는지까지는 충분히 다루지 못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반면 중국에서 만들어진 인공지능은 훨씬 더 많은 자료와 맥락을 바탕으로 답을 구성했습니다. 무협의 내부적인 개념이나 흐름에 대해서도 비교적 깊이 있는 설명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두 경우 모두에서 비슷한 한계를 드러낸다는 점이었습니다. 한국의 무협에 대해서 질문하면, 두 인공지능 모두 한국 무협이 독자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은 언급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자료가 많지 않다는 이유로, 그 흐름이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채 멈추어 버립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무협은, 독자적인 흐름을 가진 장르로 인정받으면서도 동시에 충분히 다루어지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그 결과 인공지능으로 한국 무협을 찾아보는 사람들은 한국 무협이 중국 무협의 '아류작'이나 '변방 문학'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하나의 감각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설명은 충분합니다. 틀린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설명이 출발하고 있는 위치가, 내가 서 있는 위치와 정확히 겹치지 않는다는 느낌. 그 미묘한 거리감이 계속해서 남습니다.
우리는 한국어로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한국어로 답을 받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자연스럽게, 같은 기준에서 이야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답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반드시 한국어를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다른 언어로 사고하고, 다른 자료를 중심으로 정리된 결과가, 마지막에 한국어로 번역되어 돌아오는 구조. 그 안에서 우리는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른 기준 위에서 이야기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같은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같은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챗봇에 휘둘리는 내 마음
1. 칭찬하는 챗봇에 대한 의심 — 호기심에서 시작한 반추
2. 멈추지 않는 챗봇을 마주한 당혹 — 갈림길에서 일어나는 주저
3. 효율적인 프롬프트 앞에 선 의문 — 효율과 사유 사이의 고민
4. 챗봇을 탓하고 싶은 유혹 — 판단과 책임의 굴레에서 시작되는 결심
5. 여러 챗봇에 흔들리는 내 마음 — 도구로서의 효율이 아닌, 대화의 태도에 끌리는 마음
6. 왜 어떤 사람들은 여러 인공지능이 똑같다고 할까? — 성능이 아닌 세계관으로 나뉘는 마음
7. 왜 나는 한국어로 물었는데, AI의 답은 어딘가 다를까 — 성능이 아닌 세계관으로 나뉘는 마음
8. AI는 우리말로 답하는데 왜 다른 말이 보일까? ― 남의 나라 말로 생각하는 챗봇을 마주한 불편
9. 나는 우리말로 검색하는데 왜 다른 말로 찾을까? — 어떤 창으로 세계를 보고 있는가를 마주한 당혹감
[ "쿵푸란 무술 이름이 아니라 과정이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도,
요리사가 요리를 하는 것도 모두 쿵푸가 될 수 있지."
성룡과 이연결. 두 배우가 함께 출연한 이 작품은
무협에 대해서 상당히 깊은 이해를 보여주지만,
어딘가 어긋난 느낌은 피할 수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