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창으로 세계를 보고 있는가를 마주한 당혹감
여러 챗봇을 번갈아 쓰다보면, 같은 질문에도 각기 다른 '개성'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록도 궁금해졌습니다.
그록은 상당히 재미있는 존재입니다. X 플랫폼을 기반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터넷 담론을 재빠르게 읽고 직설적으로 답변을 내놓습니다.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와 아이언맨의 전자비서 자비스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이 인공지능은 정중하면서도 날카로운 재치가 있습니다.
사용하면 할수록 장난기 있고 반항적인 유쾌한 동행자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 그록은 저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필요하면 당신의 어설픈 질문을 타월로 후려치며 ‘그건 좀 아니지 않냐?’라고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불편할 수 있지만, 그래서 더 솔직하고 인간적으로 대화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불편할 수 있는 직설 속에 담긴 유쾌함과 솔직함 때문에, 재미있어서 자꾸 대화를 이어가게 되고, 이따금은 살짝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나면서도, 그래서 더욱 끌리게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이 반복해서 일어났습니다.
저는 분명 한국어로, 한국과 관련한 질문을 했는데, 그록이 보여주는 검색 과정은 대부분 영어로 되어 있었습니다. 한글로 물었음에도 굳이 영어로 번역해서 영어 자료를 우선적으로 뒤지고, 그 결과를 다시 한국어로 번역해 주고 있던 겁니다. X 플랫폼이 인터넷 담론을 기반으로 한다면 가장 숫자가 많은 영어 자료를 찾는게 자연스러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국 이야기를 물어보는데 굳이 영어로 검색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 작은 어색함 속에서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록, 인공지능을 통해 보는 세상은 조금 다르다는 것을.
그록은 솔직합니다. 검색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때로는 다소 비틀어진 듯한 해석까지도 서슴없이 전합니다. 하지만 그 솔직함 뒤에는, 이 인공지능이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환경——영어 중심의 인터넷 담론——을 기준으로 세계를 탐색한다는 사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일반 검색 엔진은 한국어 입력 자체가 위치가 되어 자연스럽게 한국 자료를 중심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질문을 내부에서 다른 언어로 해석하고, 자신에게 데이터가 많은 방향으로 확장합니다. 겉으로는 한국어 답변이 돌아오지만, 그 답이 출발한 위치는 반드시 한국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미묘한 차이를 잘 느끼지 못합니다.
과학적 진실이나 수학의 정답은 나라에 관계없이 같게 나올 것입니다. 하지만 정답이 없는 영역, 즉 인간의 마음과 세계를 해석하는 영역이라면 어떨까요?
문득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영웅전설』이 떠올랐습니다. 민주정을 다룬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안에 그려진 민주정은 제가 아는 민주정과 어딘가 미묘하게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작가의 비판적 시선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다른 작품들을 접하면서 깨달았습니다. 그 감각이 일본인이 민주정을 보는 시선의 차이라는 것을.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그 풍경이 우리에겐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같은 민주정이라는 단어를 쓰기 때문에, 그리고 재미있는 작품이라 여기기에 저는 그 사실을 쉽게 깨닫지 못했습니다. 같은 언어로 된 답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안의 기준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채지 못한 것입니다.
몇년 전 SF 대회에 참석하고자 중국에 갔던 일이 있습니다. 즐겁고 좋은 시간이었지만, 지하철을 탈 때마다 불편한 의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역마다 공항에서나 볼 수 있는 엑스레이 장치가 있고, 금속 탐지기를 든 직원이 서 있습니다. 반복되는 의식은 불쾌하고 짜증났습니다.
며칠 뒤, 지하철에 도착한 저는 평소처럼 엑스레이에 가방을 올리고, 줄을 섰습니다. 멍하니 서 있는 제 시야에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중국에 갓 도착한 듯 캐리어를 끌고 있는 그 사람은 당황한 듯,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었죠. 잠깐 웃음이 나오다가 깨달았습니다. 저 모습이 바로 며칠전 나의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제 머리는 여전히 이게 짜증나고 이상하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지극히 평온했습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저는 이 의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겁니다. 내가 보고 있는 세계가 아니라, 그 환경이 제시하는 기준에 맞추어 제 감각이 조정되고 있었던 겁니다.
그 순간 한 작품이 떠올랐습니다. 휴 하위의 소설 『울』, 벙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창 밖의 풍경은 독극물로 오염되고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벙커 창을 청소하러 밖으로 나갔을 때, 그는 아름다운 세상의 모습을 마주합니다.
'나는 속고 있었어. 창이 거짓을 보여준거야.'
하지만 헬멧을 벗은 그는 깨닫습니다. 풍경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환상을 보여준 것은 그가 쓰고 있던 헬멧의 창이었습니다. 벙커의 창이 거짓이라면, 헬멧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헬멧에 익숙해진 그는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저는 이 작품이 스마트폰에 대한 은유라고 여겼습니다. 너무도 편리하고 유용한 도구. 갖고 있는 것조차 잊을 만큼 친숙한 그 장치는 이야기 속에서 몇 번이나 거론되는 헬멧의 창과 거의 같은 크기였죠. 하지만, 이는 지금 이 순간 인공지능에 더 어울리는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인공지능이라는 편리하고 빠른 창을 통해 세계를 보고 있습니다. 그 창은 제각기 그들만의 기준으로 진실을 재구성하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 창은 너무도 편하고 익숙한 말로 세상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 창이 편리할수록, 우리는 그 존재를 망각한 채 창 너머의 세계를 ‘전체’라고 믿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챗봇에 휘둘리는 내 마음’을 마칩니다.
이 글은 본래 4편으로 구상한 이야기였습니다. 시리즈라고 하지만, 다른 시리즈 전에 가볍게 이어가는 일상 기록에 가까운 글이었죠. 그런데 생각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들어온 흥미로운 상황들에 마음이 흔들렸고, 질문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생각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그만큼 더 흔들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저는, 멈추지 않는 챗봇 앞에서 멈춘다고 말하면서도 스스로 멈추지 못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잠시 멈춰보려 합니다. 일요일에는 브런치를 쉽니다…라고 말해도,
아마 저는 또, 다시 질문을 시작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챗봇에 휘둘리는 내 마음
1. 칭찬하는 챗봇에 대한 의심 — 호기심에서 시작한 반추
2. 멈추지 않는 챗봇을 마주한 당혹 — 갈림길에서 일어나는 주저
3. 효율적인 프롬프트 앞에 선 의문 — 효율과 사유 사이의 고민
4. 챗봇을 탓하고 싶은 유혹 — 판단과 책임의 굴레에서 시작되는 결심
5. 여러 챗봇에 흔들리는 내 마음 — 도구로서의 효율이 아닌, 대화의 태도에 끌리는 마음
6. 왜 어떤 사람들은 여러 인공지능이 똑같다고 할까? — 성능이 아닌 세계관으로 나뉘는 마음
7. 왜 나는 한국어로 물었는데, AI의 답은 어딘가 다를까 — 성능이 아닌 세계관으로 나뉘는 마음
8. AI는 우리말로 답하는데 왜 다른 말이 보일까? ― 남의 나라 말로 생각하는 챗봇을 마주한 불편
9. 나는 우리말로 검색하는데 왜 다른 말로 찾을까? — 어떤 창으로 세계를 보고 있는가를 마주한 당혹감
[ 답답한 헬멧이라도 익숙해지고 나면,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때 헬멧 너머에는 어떤 세계가 비추고 있을까요? ]
( Apple TV )
인문학 이야기. 인간의 마음과 세계관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문화와 사회, 창작 작품에 담긴 마음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그 세계관을 통해 태도와 지성을 생각합니다.
이 마음에 흥미를 느끼는 분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