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어로 말하는 외국 인공지능을 마주한 당혹
지피티를 오래 쓰다 보면, 매우 다양한 분야에 활용하게 됩니다. 작업에도 활용하지만, 취미에도 빠질 수가 없습니다. 제 경우는 몇년 전부터 취미로 즐기는 제빵 과정에서 지피티를 아주 잘 쓰고 있습니다.
제빵 레시피 자체는 인터넷에 찾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미묘하게 분량이나 재료가 다를 때, 저 같은 초보로서는 이를 맞추는게 힘들죠. 하지만, 지피티에게 물어보면 어느 정도 해결됩니다. 내가 제시한 것에 따라 어울리는 분량을 자동으로 바꾸어 주고, 온도나 시간도 생각해 주죠. 가령, 설탕 대신 꿀이나 메이플 시럽을 사용할때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하는가처럼, 재료의 특성도 생각해서 조정해 줍니다. 물론 그대로 따르는건 아닙니다. 제 나름으로 굽는 시간이나 느낌을 조정하긴 하는데, 그래도 '기준'을 잡는 데 있어서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얻은 ‘기준’이, 처음부터 나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느날 새로운 빵에 도전하려는 제게 지피티가 말했습니다.
"풍미를 추구한다면 18~24도로 숙성합니다. 이 온도를 넘어가면 과발효가 되어 풍미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잠깐... 24도라고? 지금은 여름인데?
당연히 주방은 이미 그 온도를 훌쩍 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에어콘을 세게 틀면 어떻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벌써 반죽을 마친 상태라는거죠.
'어떻게 하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왜 하필 밀가루의 숙성 온도는 이렇게 낮은거야.'라고 괜한 화를 내기도 했죠. 그러다 깨달았습니다.
'아, 제빵 레시피는 유럽에서 발달했지!'
몇년 전 아일랜드에 갔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세계 SF 컨벤션(WORLDCON) 행사를 위해 방문했을때, 아일랜드는 8월, 한여름이었습니다. 작은 호텔에 묵었는데, 에어콘이 없었죠. 하지만,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한낮의 강한 햇볕 아래에서도 온도는 26도를 넘는 일이 별로 없었거든요.
물론 아일랜드의 더블린은 우리나라보다 위도가 높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만 해도 여름은 낮에는 25도 이상 올라가지만, 밤에는 20도 이하인 경우가 많습니다. 남유럽은 훨씬 덥지만, 비교적 건조합니다. 한국처럼 푹푹찌지 않으니 실내로만 들어가도 체감 온도가 많이 내려가고, 발효 폭주가 덜하다고 합니다.
효모의 활동 온도가 나라에 따라 다른 건 아닙니다. 유럽의 기후가 제빵에 맞추어 만들어진 건 아니지만, 결국 그 환경 속에서 제빵 방식이 다듬어졌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기준에 따라서 레시피가 만들어진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한국처럼 실내에서도 30도를 훌쩍 넘는 상황을 그다지 고려하지는 못했겠지요.
그러니 지피티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 설명은 ‘어디에서나 통하는 평균적인 기준’이었고, 내가 서 있는 환경은 그 평균에서 벗어나 있었을 뿐입니다.
"풍미를 좋게 하려면 18~24도 숙성합니다."
이 말 자체는 틀리지 않습니다. 다만, 그 ‘보통의 환경’이 어디였느냐가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이 기준이 나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인공지능으로 무엇을 찾을 때마다, 비슷한 감각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음식의 조리법을 물을 때, 특정 지역의 문화를 물을 때, 한국의 인물이나 작품을 물을 때. 틀린 것은 아닌데,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는 느낌. 마치 오래된 번역 소설을 읽을 때처럼, 내용은 이해되는데 언어 뒤에서 다른 무언가가 느껴지는 감각.
처음에는 그냥 넘겼습니다. 한두 번 쯤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답변 속에 영어 문장이 통째로 남아 있는 것을 보았을 때는 더 이상 그냥 넘기기 어려웠습니다.
'아, 그래. 지피티는 미국 프로그램이구나.'
이러한 감각이 명확하게 느껴졌죠.
그 순간 떠올랐습니다. 제가 지피티를 처음 사용했을 때의 일이. 당시 저는 칼럼을 쓰다가 한 판타지 소설에 대해서 잘 기억나지 않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본래는 제 도서관에서 책을 펼치거나 인터넷을 뒤졌겠지만, 그날은 지피티에 물어보았죠.
"[드래곤 라자] 소설을 알려줘."
네. 당시엔 뭘 어떻게 쓰는지도 몰랐고, 지피티에 존대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직설적으로 물어본 것입니다. 하지만, [드래곤 라자]는 한국에서 워낙 유명한 작품입니다. 일부 교과서에도 소개되었을 정도. 이 정도라면 당연히 대답이 나올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확실히, 대답은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 뭔가 이상합니다. 아니, 이건 뭔가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틀린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를 알려줘.'
어? 도대체 어떻게 된거지? 작가 이름이 왜 달라지는데? 게다가 중국 소설이라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저는 이 내용으로 검색해 보았습니다.
아! 그제야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같은 제목이 또 있었습니다. 2010년에 나온 중국 작품. 한국의 한 신문에 중국에서 [드래곤 라자]라는 제목의 소설이 나왔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기사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제가 한국어로, 그것도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라고 명확하게 물었음에도, 전혀 다른 중국 작품을 소개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렇죠. 드래곤 라자라는 작품에 대해서 중국 작품을 이야기한 게 틀린 내용은 아닙니다. 인터넷 상의 작품 이야기에서 국적이나 작가 이름이 빠지는 일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하지만, 한국인이, 한국에서 한국어로 한국에서 유명한 작품을 물어보는데, 우리나라에선 짧은 신문 기사 외에는 정보가 없는 중국 작품을 소개한다...
뭔가 기준이 어긋나 있다는, 감각. 바로 제빵에 대한 대답에서 들어온 것과 같은 문제가 보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결국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제빵에 대한 지피티의 설명이 한국이라는 기준을 생각하지 않듯, [드래곤 라자]에 대한 설명도 한국 기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드래곤 라자]는 한국에선 분명히 유명하고 관련된 자료도 매우 많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세계 기준으로 보면 어떨까요?
아니, 무엇보다도 지피티를 만든 미국 기준에서는 어떨까요?
물론, 이건 초기 모델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드래곤 라자에 대해 물어본 건 2023년이니까요. 이를 통해 제가 지피티를 2년이 아니라 3년 넘게 썼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습니다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지피티는 월등하게 향상되었습니다. 계속 사용하면서 그걸 명확하게 느꼈죠. 이제는 더이상 '드래곤 라자'라는 제목에 중국 소설이나 조정래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안 합니다.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를 정확하게 제시하고, 줄거리, 주요 인물, 의미 등을 잘 정리해서 알려줍니다. 하지만, 그때 제빵 대화처럼 미묘한 차이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무언가 그럴듯 하게 말해주는 것 같지만, 확실히 말해서 '기준'이 미묘하게 어긋난 느낌.
과연 이러한 기준이 제빵에만 적용될까요?
요즘 한국형 AI, 데이터 주권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서버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데이터를 누가 관리해야 하는가. AI 주권이 어떻고, 군사 기밀이 어떻고...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느낀 것은 조금 다른 문제였습니다.
서버의 위치보다도 사고의 출발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
어떤 언어로 말하는가가 아니라, 그 언어 뒤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생각하는가입니다. 이는 그 기준이 나와 얼마나 가까운가, 혹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좀 더 정리하지만, 기술이 아닌 그 안에 담겨 있는 세계관과 사고 방식,
인공지능 시대의 정신적 주권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분명히, 나는 한국어로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답은 과연 한국식으로, 한국어로 생각한 답일까요?
우리는 지금 누구의 생각을, 한국어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요.
챗봇에 휘둘리는 내 마음
1. 칭찬하는 챗봇에 대한 의심 — 호기심에서 시작한 반추
2. 멈추지 않는 챗봇을 마주한 당혹 — 갈림길에서 일어나는 주저
3. 효율적인 프롬프트 앞에 선 의문 — 효율과 사유 사이의 고민
4. 챗봇을 탓하고 싶은 유혹 — 판단과 책임의 굴레에서 시작되는 결심
5. 여러 챗봇에 흔들리는 내 마음 — 도구로서의 효율이 아닌, 대화의 태도에 끌리는 마음
6. 왜 어떤 사람들은 여러 인공지능이 똑같다고 할까? — 성능이 아닌 세계관으로 나뉘는 마음
7. 왜 나는 한국어로 물었는데, AI의 답은 어딘가 다를까 — 성능이 아닌 세계관으로 나뉘는 마음
8. AI는 우리말로 답하는데 왜 다른 말이 보일까? ― 남의 나라 말로 생각하는 챗봇을 마주한 불편
9. 나는 우리말로 검색하는데 왜 다른 말로 찾을까? — 어떤 창으로 세계를 보고 있는가를 마주한 당혹감
[ 우리는 이 시스템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매우 유용하고, 훌륭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들은, 과연 어디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