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계절을 건너온다

7화. 빗속에 남은 흔적

by 구혜온

밤새 퍼붓던 비가 그치고, 아침이 되자 마을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길은 흙탕물로 인해 푹 꺼지고,

돌덩이와 나뭇가지가 곳곳에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솔향집 처마 밑에 서서 멍하니 바깥을 바라봤다. 어젯밤 장면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물살에 휩쓸릴 뻔한 걸 끝까지 버티던 사람들,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이웃들, 그리고 흙탕물 속에 뛰어들던 태석. 그 뒷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겹쳐졌다.

“아침 드세요.”
박선옥 씨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식탁 위에는 대충 끓인 죽과 김치가 놓여 있었다.

박선옥 씨와 그녀의 아들, 나와 태석.

네 사람은 피곤한 얼굴로 숟가락을 들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박선옥 씨가 얼굴을 가까이 대고는

태석 쪽을 힐끗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참 저 양반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사람이 괜찮긴 한데… 왜 이렇게 오래 우리 민박집에만 묵는지.”

순간 귀가 번쩍 열렸다. 태석은 못 들은 척 묵묵히 죽만 먹고 있었다. 손등에 난 상처가 눈에 띄었다. 어젯밤 삽을 그렇게 휘두르더니 결국 저 모양이 된 거였다.

식사가 끝날 무렵, 조용하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 전남편이었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받자니 겁나고, 안 받자니 더 불안했다. 나는 결국 화면을 꺼버렸다.
식사를 마친 태석이 우비를 챙기며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페 문 열어야 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어제 하루 종일 못 열어서요.”
그가 툭 던지고 나가자, 주방 안 공기가 갑자기 휑해졌다.

카페 '달빛'.
간판은 볼품없었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은은한 커피 향이 감돌았다. 창가에 걸린 화분들은 아직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고, 벽에는 흑백사진 몇 장이 붙어 있었다.

나는 괜히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태석이 컵을 닦다가 불쑥 말을 걸었다.

“어제… 많이 놀라셨죠?”
“네. 근데… 왜 그렇게까지 무리한 거예요?”

그는 잠깐 멈칫하더니 컵을 내려놓았다.
“누군가는 붙잡아야죠. 놓치면 안 되는 거, 있잖아요.”

평범한 말 같은데 이상하게 마음에 박혔다. 더 묻고 싶었지만, 그의 눈빛이 차가운 벽처럼 닫혀 있어서 입술만 달싹이다 말았다.

창밖에서 마을 사람들이 오가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 원래 여기 사람 아니잖아.”
“도시에서 잘 나가던 사람이었는데, 무슨 일 있어서 내려왔다던데.”

그 말에 괜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태석의 얼굴을 훔쳐봤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마을은 아직도 정전이었다. 솔향집 거실에 초 한 자루가 켜졌다. 박선옥 씨 모자와 태석, 나 이렇게 넷이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지만, 나는 도통 집중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아이 얼굴만 떠올랐다.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아빠 옆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엄마를 찾진 않을까. 죄책감이 몰려왔다.

그때 태석이 촛불을 멍하니 보면서 툭 내뱉었다.
“누군가 생각하면… 더 그리워지죠. 불빛 꺼지면 더 선명해지고.”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여전히 촛불만 보고 있었다. 그냥 혼잣말처럼 뱉은 건지, 아니면 나를 보고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방으로 돌아오는데도 그 한마디가 계속 맴돌았다.
‘놓치면 안 되는 거.’
아들의 얼굴과 태석의 뒷모습이 겹쳐졌다.

도피라고 생각했던 이곳에서의 시간이, 어쩌면

자신을 끌어내리려는 무언가로 바뀌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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