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있었던 5km의 첫 가족 마라톤 출전 이후, 2달 만에 저의 극적인 호기심으로 하프코스(21km)를 나가게 되었지만 속으로는 내심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옆에서 같이 뛰어주는 것이 한편으로는 큰 위로와 힘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혹시 몸이 안 따라준다거나 완주도 못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 옆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부담스럽고 내가 뱉은 말을 몇 곱절로 후회하게 만드는 단단하고 어두운 거울 같은 느낌이 들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8km, 10km, 14km.. 하프코스를 위해 달리는 거리를 조금씩 늘려갔었지만 두 달이라는 시간은 달리기 연습을 하기에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었고, 제가 달려야 하는 21km라는 거리는 더더욱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감정에 따라서 즉흥적으로 쉽게 결정해 버리는 저의 성격이 그냥 일을 저지른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 자욱하게 들던 불안감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옅어지고 줄어들었습니다. 불안감보다는 멋진 선수들과 드디어 '하프 코스'에서 같이 뛰어본다는 기대감이 훨씬 크게 저의 마음을 압도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부푼 마음은 점점 커져 집에 배번이 포함된 택배가 도착했을 때는어린아이마냥 환호성을 지르며 무슨 대단한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의 첫 하프코스 대회. 스칼렛 부부로 출전했다
남편과 함께 뛰기에 '스칼렛 부부'라는 이름으로 커플을 신청했습니다. 첫 마라톤 대회 때 커플 신청이라니... 무엇이든 첫 기억은 이렇게 풋풋하고 싱그런 것일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에만 커플이 신청이 되었지, 이후 다른 대회에서 저희는더 이상 커플을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남편과 저의 기량 차이가 많이 나기도 하고 이제는 각자 뛰는 포지션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지금 돌이켜보니 마치 첫 데이트인양 저 때가 참 낭만적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침내 대회 당일이 되었습니다. 두근두근 떨리고 긴장이 되기도 했지만 아이들을 돌 볼 필요도 없이 오로지 저의 힘만으로 달려보는 '마라톤' 대회의 첫 출전은 인생에서 큰 획이 그어지는 것처럼 또 다른 세계가 새롭게 열리는 것 같았습니다.
주차장은 역시나 복잡했습니다. 경험이 많은 남편은 여유롭게 차를 움직이며 주차공간을 찾고 있었지만 행여나 너무 멀리 대어 출발시간에 지각할까 봐 저는 조마조마하게 애간장을 태웠습니다. 먼 곳이긴 했지만 다행히 우리는 주차를 했고 화장실도 들렸으며 운동장에 도착하여 빠뜨린 것은 없는지, 복장이나 준비물은 잘 챙겨졌는지 여유 있게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역시나 대회장은 너무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선수들을 보는 것도, 갖가지 다양한 스포츠 의류와 운동화를 보는 것도...
날렵한 몸매에 슬림한 옷차림을 입은 선수들을 보고 있자니 다음번에는 저도 좀 더 옷차림에 신경을 쓰고 나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2시간 넘게 따가운 햇살아래에서 뛰어야 했지요. 선크림을 바르긴 했지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대에 찬 생각과는 다르게 저는 하얀 헝겊으로 모자를 감싸는 패션을 택함으로써 촌실방한 아줌마로 대기선에 섰습니다.
첫 하프코스 대회때의 나의 복장
"자 이제 하프코스 출전자들의 레이스가 펼쳐지겠습니다."
폭죽소리와 함께 선수들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와~~~~!!"
저도 고함을 지르고 환호성을 지르며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축제도 이런 즐거운 축제가 없었지요. 남편이 처음에 페이스를 올리면 안 된다고 누차 강조하던 터라 천천히 달리면 되었기에 전 그 순간의 기쁨을 느끼는데 오롯이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남편은 시간대별로 풍선을 달고 있는 '페이스 메이커'를 가리키며 2시간 20분 아저씨를 따라가자고 했습니다. 알겠다고 말은 했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여기서도 저의 즉흥적이고 기분파인 성격은 툭 튀어나왔습니다. 오르막길이 나오면 속도를 늦췄지만 내리막길이 나와서 뛰어볼 만하다고 생각이 들 땐 보폭을 크게 하며 속도를 올렸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초심자이기에 가능한 어설픈 레이스의 단면이 아니었을까요? 이왕 마라톤에 출전한 거, 기록을 신경 안 쓸 수가 없었습니다.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던 터라 저의 자취들이 그대로 기록될 텐데 조금이라도 더 기록을 단축시키고 싶었습니다.
남편은 열심히 저를 찍어줬습니다. 동영상도 찍고, 사진도 찍었습니다. 농담도 건네고 생각보다 잘 달린다고 칭찬도 해줬습니다. 남은 거리가 표시된 푯말이 나올 때마다 뛰었는 거리보다 가야 할 거리가 더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달리고 있는 스스로가 대견하면서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마라톤의 첫 하프코스를 완주했습니다. 생각보다 기록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가슴 벅차고 흐뭇했죠.
'내가 해낸 거야? 진짜?'
'생각보다 재미있다!'
레이스가 끝나고 난 뒤, 골반은 많이 뻐근하고 다리도 뻣뻣했습니다.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해 절뚝절뚝거렸지만 마음은 승리자가 된 듯 도취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메달을 목에 걸고 기록을 폰으로 확인할 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이 저의 마음을 압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대회가 저에게 자긍심과 보람을 주는 특별한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1. 연습 때, 최고 거리가 18km였는데 21km의 최장 기록을 달성한 것.
2. 하프코스에서 걷는 분들도 종종 계셨는데 늦게 달릴지언정 한 번도 걷지 않았다는 점.
3. 3월에 달리기를 처음 시작하고 5km의 첫 대회출전 이후, 두 번째 대회에바로 21km (하프코스)를 완주한 것.
4. half코스에서 커플 run으로 참가해 4등 한 것.
남편과 출전한 마라톤 첫 하프코스
2시간 이상 달린 고생은 큰 수압의 물로 깨끗이 씻어낸 듯 이미 달아나고 없었습니다. 뻐근하고 불편한 몸이 오히려 무슨 훈장이라도 단 것처럼 뿌듯하게 느껴졌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