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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서조 Nov 08. 2024

『인생의 모든 의미』

존 메설리 지음. 「삶의 의미에 대한 101가지 시선들」

이 책의 원어명은 『THE MEANING OF LIFE』. 부제목은 「삶의 의미에 대한 101가지 시선들」이다.

〈Meaning of Life〉 시리즈 중 하나이다. 이 시리즈 중 가미야 미에코 지음. 홍성민 옮김, 『삶의 보람에 대하여』를 읽고 싶다.     


늘 ‘삶’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왜, 사느냐? 죽음이란 무엇인가? 등등…. 지금도 궁금증은 해소되지 않았지만,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해탈했다는 말에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 질문을 포기했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해서 읽었다.     


인생은 무엇인가? 인생의 모든 의미는 무엇인가? 삶이 의미는 무엇인가? 책을 읽었지만 모르겠다.


이 책은 열 개의 주제로 되어있다. ‘1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 이해하기’ ‘2 초자연주의: 종교적 대답들’ ‘3 불가지론: 질문이 무의미하거나 대답 불가능하다.’ ‘4 허무주의: 삶은 무의미하다.’ ‘5 자연주의: 주관적 의미’ ‘6 자연주의: 객관적 의미’ ‘7 삶의 의미와 죽음’ ‘8 과학은 죽음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고 왜 물리쳐야 하는가’ ‘9 완전히 유의미한 우주의 진화’ ‘10 결론’.     


저자는 들어가는 말에서 “우리는 절박한 철학적 질문들에 봉착한다. 정말로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토록 많은 고난과 죽음을 포함한 세계에서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은 인간 삶의 중심에 위치한 철학적 질문이다. 우리는 결국 고통을 겪고 소멸한다. 우리의 모든 희망, 계획, 열망, 사랑이 결국 사라진다면, 그 모든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리의 질문은 단지 학술적인 논제로 머물지 않는다. 이 질문은 인간 실존의 핵심을 꿰뚫는다.”라고 한다.     


프로이트는 “누군가가 삶의 의미를 묻는 순간, 그는 병든 것이다.”라고 말했다. 상황이 순조로울 때보다 열악할 때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더 많이 제기된다. 그러나 그 질문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우리는 행복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삶의 의미에 대한 의문을 품을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행복이 삶의 의미임을 말해주는 것일까?      


행복이 삶의 의미일 수도 있다. 행복하고 잘 산다면, 그 이상 어떤 의미를 바라겠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행복하지만 의미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다. 행복이 의미와 같지 않다면, 도덕적 삶이 곧 의미 있는 삶일지도 모른다. 삶은 도덕과 무관하게 이를테면 창작에 몰두할 때나 심지어 사소한 유희를 즐길 때에도 유의미할 수 있다. 삶이 행복하거나 도덕적이라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의미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행복이나 도덕과 의미가 동일함을 뜻하지 않는다.      


제임스 볼드윈의 작품에 나오는 다음 대목은 인상적이다. 

“삶은 비극적이다. 그것은 그저 지구가 돌고 해가 어김없이 뜨고 지다가, 우리 각자에게 어느 날 마지막 해가, 최후의 해가 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의 문제, 인간 문제의 모든 뿌리는, 죽음이라는 사실, 즉 우리가 소유하나 유일한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서, 삶의 모든 아름다움을 희생시키리라는 것, 우리 자신을 토템, 금기, 십자가, 피를 바치는 제사, 첨탑, 이슬람 사원, 인종, 군대 깃발, 국가 안에 가두리라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죽음은 삶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죽음은 삶의 의미를 감소시킨다.

죽음은 삶의 의미를 증가시킨다.

죽음은 삶을 유의미하게 만든다.

삶이 좋다는 이유로 죽음을 나쁜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또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실존의 종말로서 죽음을 환영할 수도 있다.     


삶의 의미를 탐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현대 과학이 아는 사실들을 고려해야 한다. 현대 과학을 모르면 일관된 세계관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 세계에서 과학은 유일하게 인지적 권위를 가졌기 때문이다. 과학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지식으로 이루어졌다. 그 지식은 과학이 낳은 놀라운 기술에 의해 입증된다.     


보편적 죽음은 우리 자신의 죽음을 확장한 최종 결과다. 우리는 작품이나 자식을 남기는 것에서 의미를 찾음으로써 자신의 죽음과 화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만일 모든 것이 결국 죽는다면, 결국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만물은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톨스토이는 자기 자신이 이성과 신앙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성을 선택하면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고, 신앙을 선택하는 것은 이성을 배제하는 것을 뜻한다. 신앙이 제공하는 답이 아무리 비합리적이고 기괴하더라도, 그 답은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한다는 장점이 있다. “신앙이란 삶의 힘이다. 사람이 산다면, 그는 무언가를 믿는 것이다.”     


유신론은 여러모로 무신론보다 우월하다. 특히 삶에 의미를 제공하는 능력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유신론은 거짓이라고 사실상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유신론이 참인 양 사는 것이 더 낫다. 신이 있다는 쪽에 도박을 거는 것이 개인에게 유리하다.     


불가지론이란 어떤 주장의 진위를 모르거나 알 수 없다는 입장이다. 또한 특정한 질문들에 답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회의주의를 가리키기도 한다. 불가지론은 종교적 믿음에 적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삶의 의미에 적용된다.     


허무주의란 앎, 가치, 의미 등, 삶을 좋게 만든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존재를 부정하는 철학적 입장이다. 참된 허무주의자는 앎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또한 가치 있는 것이 있다거나 삶이 의미 있다고 믿지 않는다. 허무주의는 극단적인 절망의 기분이나 삶 전체에 대한 비관을 가리키기도 한다.     


로버트 솔로몬(1942~2007)은 미시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오스틴 소재 텍사스 대학에서 퀸시 리 센테니얼 철학, 경영학 교수를 역임했다. 그의 저서 《커다란 질문들》에서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은 커다란 질문이다. 즉, 대답하기 가장 어려운 질문이며, 가장 긴급하면서 또한 가장 불명확한 질문이다”라고 말했다.     


솔로몬에 따르면,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요구하는 대답은 어떤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참여하는 삶에 대한 비전 정도다. 열거하면 게임, 비극, 사명, 이야기, 예술, 모험, 질병, 욕망, 수행, 이타적 활동, 명예, 학습, 실망, 관계, 또는 투자로서의 삶 등이 있다.     


삶이 게임이라면, 삶을 너무 진지하게 대하지 않으면서 여전히 승리를 원하거나 훌륭한 선수가 되기를 원할 수 있다. 삶이 이야기라면, 자신을 진행 중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여기면서 그 역할을 스스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이 비극이라면, 불가피한 죽음을 직시하면서 용감하게 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모른다. 농담이라면, 우리는 삶을 덜 진지하게 바라보며 웃어넘길 수 있다. 사명이라면, 타인들을 변화시키거나, 혁명을 일으키거나, 도덕을 향상 시킬것이다. 예술이라면, 아름다움이나 개성, 혹은 품위가 있는 삶을 창작하기를 원할 것이다. 모험이라면, 위험을 무릅쓰고 한계에 도전하기를 즐길 것이다. 질병이라면, 모든 것은 죽음으로 마감될 것이다. 욕망이라면, 충족이 의미를 산출할 것이다. 삶이 수행이라면, 삶의 목표는 욕망을 제거하고 평정에 이르는 것이다. 이타적 활동이라면, 보답이 없더라도 타인들을 위해 살 것이다. 명예라면, 타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우리의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 학습이라면, 배움에서, 우리의 역량을 키우고 발전시키는 것에서 만족을 얻을 것이다. 고이라면, 최선은 명상이나 자기부정을 통해 삶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다. 투자라면, 삶의 시간을 돈이나 명성 같은 보상을 얻기 위해 투자할 자본으로 여길 것이다. 관계라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우정일 것이다. 우리는 삶에 대한 우리의 비전에 맞게 살아감으로써 의미를 창조한다.     


대다수 사람이 죽음을 궁극적 비극으로 여기고 삶의 지속을 갈망한다. 죽음에서 돌아와 사후의 삶에 대해서 말해주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간접적 증거에 매달린다. 임사체험, 환생에 대한 믿음, 유령 이야기, 죽은 사람과의 소통 등이다. 일반적으로 현대 과학은 사후의 삶을 무시한다. 불멸한다고 여겨지는 영혼은 인간에 대한 현대 과학 연구에서 배제된다. 뇌 기능이 멈추면 의식도 멈춘다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압도적으로 많다.     


미래에는 뇌가 몸과 분리되어 안전한 뇌 저장시설로 옮겨질 것이다. 동시에 가상현실로 이동할 것이다. 당신은 완벽한 가상현실 속에서 성가신 물리적 신체 없이, 신체가 부과하는 한계 없이 살 것이다. 기술이 우리의 뇌를 대체하게 될 때, 새로운 기술적 뇌가 로봇 신체나 가상현실 속에서 존속하게 될 때, 우리는 일종의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이 변화는 진화 과정에서 멸종한 모든 종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류가 다른 종으로 대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이 죽음을 선택사항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선택권이 주어지면 대다수 사람이 그 선택권을 행사하여 죽음을 피하리라고 생각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죽음을 물리치는 기술이 언젠가 실현될지, 혹은 실현되더라도 우리의 생전에 실현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기술이 죽음을 물리치더라도 유의미한 삶은 여전히 보장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긴 삶이 유의미한 삶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생은 완전한 의미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완전히 유의미한 삶을 위해서는 양뿐 아니라 질이 필요하다.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은 생존과 번식이다. 우리는 수십억 년에 걸친 진화의 산물이다. 생명은 무수한 조건들이 우연히 맞은 덕분에 존속했다. 우리는 사랑하고 일하고 놀이하고 몰두하고 초월하고 과학이 포착한 세계에서 초월적 의미를 발견하고 외경심을 느낀다. 외경심을 일으키는 대상은 의미의 원천이다. 진화는 의미를 내장했을뿐더러 원한다면 의미를 경험할 능력을 갖춘 존재들을 산출했다. 삶은 진화하기 때문에 유의미하며, 우리는 이 의미의 진화에서 핵심 역할을 하기때문에 유의미한 삶을 산다.     


윌 듀런트는 저서 《삶의 의미에 관하여》에서 

삶의 의미는 삶 안에 있어야 한다. 삶의 가장 단순한 의미는 즐거움이다. 경험 그 자체의 유쾌함, 건강의 유쾌함, 근육과 감각, 혀와 귀와 눈의 순수한 만족이다. 설령 아름다운 순간들 외에는 삶에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빗속을 터벅터벅 걷거나, 바람에 맞서거나, 순백의 설원에 발자국을 남기거나, 노을이 밤으로 바뀌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삶을 사랑할 이유로 너무나 충분하다. 아들, 딸을 둔 아버지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라.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라는 아주 간단한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우리 각자 안에 갇힌 예술가가 있다. 그를 풀어주어 만방에 즐거움을 퍼뜨리게 하자.”이다. 동의한다.     


책 소개

『인생의 모든 의미』 존 메설리 지음. 전대호 옮김. 2016.06.15. 필로소픽. 533쪽. 30,000원.

     

존 메설리 John Messerly. 오스틴 소재 텍사스 대학교의 철학과와 컴퓨터 공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세인트루이스 대학교에서 강의했고, 시애틀 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서. 『우리는 누구인가: 인간 본성에 관한 종교적, 철학적, 초인간주의적, 과학적 관점들』 『철학적 윤리학: 이론과 실제』 등.     


전재호.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와 같은 대학원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독일 쾰른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9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과학 및 철학 분야의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 『철학은 뿔이다』. 시집 『가끔 중세를 꿈꾼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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